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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광복군OSS특수부대의 국내진공 침투작전은 성공했을까?

 



광복군 OSS특수부대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광복군 OSS특수부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과 함께 계획했던 조선 본토 침공 작전 계획의 일부였다.
필자는 특공연대 출신이라서 유독 특수부대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현대적인 특수부대의
작전과 광복군 OSS특수부대의 작전 계획에 따른
국내 진공 침투 계획이
과연 성공했었을까?라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광복군 OSS특수부대의 창설과 배경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이하 O.S.S가아닌 OSS로 통칭)은
미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을
성공 시키기 위해 한인 출신의 지하공작원들을 조선에 미리
침투시키는 방안을 구상했다.(그러나 실질적으로 전면적인 상륙작전이 아니라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침투 공작)

특히 미군은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으로 편입한 '조선 학도병'출신들이 일본군의
사정에 밝고,광복군이라는 
일본에 저항하는세력으로서 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 그들과 함께 미군 단독 국내
침투 공작의 어려움을  타개시키는 방안으로 작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광복군 2지대장 이범석은 미국 14항공대 쉬노우더,중경에 있는 주중 미군 사령관
웨드마이어 중장을
만나서 한미합작의 합의를 하고,1945년 2월 김학규 3지대장은
미군 14항공 사령관 첸놀트 장군과
한미공동작전을 설명하고 아래의 6개항에 합의 한다.

<한 ·미 군사합작 합의사항>

① 한 ·미 양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박멸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 공동작전을 전개한다.
② 한국 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무전 기술과 기타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하여 연합군 작전에 필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한다.
③ 미군은 공동작전에 필요한 모든 무기, 기재 및 군수물자를 한국 광복군에게 공급한다.
④ 미군은 한국 광복군에게 육·해·공 교통통신의 편의를 제공한다.
⑤ 기타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상호 제공한다.
⑥ 합의된 사항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기 상부의 재가를 받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는데 상호 적극 노력한다.  


위에서 보듯이 미국은 광복군 OSS 특수부대원들을 국내진공작전보다는 정보 수집을 위한
정찰대로서의
역활을 기대하고 활용하기 원했다.



광복군 OSS특수부대 구성과 훈련

1945년 극동전구 중국전선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력 단체인 광복군과 미국 OSS는
한미공동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맞추어서 부대를 구성하고 훈련을 실시했다.

먼저 섬서성 서안과 부양에 한미군사합작을 위한 광복군 OSS 훈련소 설치를 했는데
승인 시기가 1945년 6월경이었다.광복군 3지대장인 김학규는 엄도해,윤영무등
22명을 적격자로 선발하고 입황 부근의 훈련소 막사에 도착해서 미군용 군복과
보급픔을 지급받고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훈련기간:3개월
교관:윔스대위,마틴상사 특수작전 요원

1)폭파
2)침투
3)사격
4)요인암살
5)무전훈련 및 암호 해독법
6)독도법
7)첩보 수집 및 분석.
8)민사작전을 위한 삐라 작성 및 민사전 부분(민중선동파업)
9)유격훈련
10)도피및 야간습격


실제로 필자가 현재 대한민국 육군 특전사 교범과 비교해본다면 전형적인 특수부대의
훈련과목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었다.특히 민사전 과목이 많은 것을 통해서 타격후
회피와 탈출보다는 거점확보를 통한 특수전을 대비한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 OSS 한국인 요원과 광복군 OSS특수 부대의 차이

일부 광복군 OSS 특수부대에 대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광복군 OSS특수부대는
실제적으로 미군과 합동작전을 위하여 만들어진 부대이다.
그래서 미국 OSS 한국 요원들과
어느 정도 차별성을 두어야 한다.

실제로 미군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언어 부분에 대한 조선인을 채용하고 그들을 활용했는데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많은 한인들이 미군 OSS에 자원해서 다양한 작전에 임했다.


미국전략사무국 (Office of Strategic Service)는 후에 미국 CIA로 바뀌어진 정보부서이다.
그래서 이곳에 채용된 한인들은 미국 시민권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김하태(전 목원대총장)씨는
미국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채용이 거부되었다.

미국 OSS요원으로 채용된 한인들은 대부분은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지원했고
실제로 그들의 임무는 대부분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군의 문서와 암호를 해독하고
번역하는 언어관련 정보 업무에 투입되었다.

광복군 OSS특수부대원들은 실제로 훈련은 미군에 받지만 소속은 광복군 소속이었고
미국 OSS 한국요원들은 미국 OSS 소속의 미국시민권자들이었다.그런 이유로 미국
OSS 한국요원들은 채용이나 고용이 되었지만 광복군 OSS특수부대원들은

고용이나 채용 서류에 소속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라고 계급을 명시했다.



광복군 OSS 특수부대의 조선 국내 진공 침투는 성공했을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꼭 알아야 할 것은 현재 필자가 쓰고 있는 글의 방향은 실제로
현대 특수전과
비교하여 광복군 OSS특수부대의 작전 성공여부이다.즉 무조건적인
민족 우월주의는 배제하고
냉철하게 판단을 하고 객관적인 사실로 작전에 대한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다.


광복군 OSS특수부대의 작전을 설명하기 이전에 우선 미국과 일본의 전쟁에서
미국의 작전 범위에
조선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먼저 설명하고 싶다.

미군은 '올림픽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규슈 지역을
1945년 11월에 1946년 3월경
관동지역에 상륙할 예정이었다.이것은 미군에게 조선이라는 지역은
상륙작전에서
제외된  지역이라는 이야기이다.(초기 주요시설 파괴 침투공작 참조)


그렇다면 여기서 특수전에 대한 개념을 잠시 설명해보자.
특수전을 대비하여 아무리 열심히 훈련을 하고 뛰어난 군인이 있어도,보급과
지속적인 후방지원이
없다면 특수전은 말그대로 특수하게 죽는 경우를 의미한다.
(실제로 필자의 특공연대에서도 북한 주요시설
타격침투 목표가 있었는데,
그 목표 타격 후 복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대원은 별로 없었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한국 전쟁 당시에 북한 지역에 침투했던 한국군 특수부대원과
유격대원들이
전투중에 사망했을까?아니다.그들은 장기간의 특수 작전 중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전사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1945년 8월29일이 원래의 디데이였다.국치일을 맞이하여 8월29일 국내진공을 염두에 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OSS특수부대원들은 8월초에 갑자기 일본 패망 임박하자
작전을 서둘러 변경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8월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3개 지구대의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여 8월20일 안으로 함경도로부터 경남 남해까지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카탈리나 섬에서 한인요원들이 공중으로 국내진공을
하는 "냅코 프로젝트"구상했었다.

하지만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필자의 생각으로 광복군 OSS 특수부대의 작전은 전원 전사였을 가능성이 많았다.
왜냐하면 실제로 짧은 기간의 특수 훈련을 받았다고 무조건 그들이 성공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실제 특수부대를 나온 사람들은 모두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제대로 된 특수부대의 정예들은 5년이상의 경력을 가진 부사관들이 중심이다.
그런 이유로 필자와 같이 특공연대 사병들은 특전사에 밀릴 수 밖에 없다.
(특공연대는 북한 특수군 숫자와 맞추기 위해서 설립된 부대이다.특수부대는
작전 후 전멸이라는 가정이 있다는 상황을 인지하면 이해가 된다)

초기 22명과 추가 적으로 50여명등 일개 대대급도 안되는 병력으로
특수 작전을 동시 다발적으로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여기에 미국은
그들은 조선 상륙작전보다는 실질적으로 정보수집 정찰대원으로만 생각했다.

광복군 OSS 특수부대원들은 아마 침투후 전원 사살이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지만
그 부대원들의 작전 성공 여부를 떠나서 도화선이 되어,만약 임시정부의 국내정진군의
시기와 맞아 떨어졌다면 조선 내에 일본군의 세력이 많이 약화되고,하나의 항일 저항
무력 투쟁 운동의 시초가 될 수 는 있었다고 판단한다.



일본 패망이 1년만 늦었다면?

일본의 패망 후에 이승만과 김구의 운명은 엇갈리게 되는데,미국은 임정은 인정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귀국 후 강요했고,이승만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대한민국의 정국을 주도했다.

여기서 필자가 미국 OSS 한인 요원과 광복군 OSS 특수요원의 차이를 이야기한
중요한 목적과 배경이 나온다.미국 OSS 한인 요원 추천에 이승만이 적극 가담했고
이것은 후에 미군정에 대한 이승만의 파워와 영향력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다.

만약 일본 패망이 1년만 늦어서 조선으로의 광복군 진공계획이 실행되고
광복군 OSS 특수부대원들의 활약이 시초가 되어서 항일 운동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미국도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한미 작전을
진행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야속하게도 임시정부의 활약은 중국군에 배속된 하나의 단체로
미국에게 비춰지게 만들어 버렸다.역사적으로 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오갈데 없는 아픔을 겪은 힘없는 존재로 각인된 것이다.

역사는 가정이라는 것을 하면 안된다고 한다.그러나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픈 역사의
오류가 존재하고 있다.이승만 정부가 권력을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고 난 후에
항상 정치가와 위정자들은 민족의 미래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힘을 썼다.

일본패망후 귀국전 이범석장군


이것은 결국 지금의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결과로 이어져,한국 사회는
민족의 자긍심보다는 권력과 부,개인의 삶이 늘 우선이 되어 버렸다.

비록 전멸당하는 것을 알고 광복군 OSS 특수부대에 자원했던 사람들과
학도병으로 사살의 위험을 인지하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사람들과
독립군으로 있었다는 사실로 온 가족이 고통을 받을 것을 아는 사람들.
왜 그들은  소중한 목숨과 가정과 가문을 버렸을까?

한 개인의 힘은 약하다.그리고 그 개인이 할 수 있는 능력도 적다.
위정자의 힘은 강하다.그리고 그 정치 권력은 무한한 힘을 가졌다.

국민의 힘은 나라를 위하지만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력만을 추구했던
역사의 오류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자료,이미지 출처 및 인용
김우전 광복회 부회장의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O.S.S. 특공작전용(特攻作戰用) 한글암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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