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작곡가가 국내 음악계 중 권위가 있다고 알려진 '난파음악상'을 거부하여 파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작곡가 류재준씨는 홍난파를 기리는 '난파음악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친일파 음악인 이름으로 받기 싫다'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서울대 음대 작곡가와 크라코프 음악원을 졸업한 류재준씨는 현대음악의 중요한 요소인 '불확실성'을 확립하여 작곡가로 서양음악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폴란드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가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할 만큼 실력 있는 작곡가입니다.
난파음악상이라는 권위있는 국내 음악상을 거부한 이유가 홍난파가 친일파 음악인이라는 이유 때문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파문이 일어나고 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홍난파는 친일파 음악인이 맞는지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 수양동우회 사건과 조선문예회'
본명 홍영우, 그러나 홍난파로 더 유명한 홍난파는 한국 근대음악사 중에서 양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국 음악사에 공헌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하는 '친일조사보고서'명단에 올랐다가 유족이 명단에서 빼달라는 행정소송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수양동우회' 사건입니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단체로 이광수, 주요한,주요섭,김동원 등에 의해 결성된 단체입니다.
수양동우회 사건이 홍난파와 왜 중요하냐면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시점에 일제가 강압통치를 위해 동우회를 표적 수사해서 이 단체 관련자를 체포했는데, 여기에 홍난파가 연루됐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홍난파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친일 행각을 본격적으로 했으며, 이는 어쩔 수 없는 강압에 의한 것이라 진짜 친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1937년 5월 2일 본정통(명동) 경성호텔에서 발회식
참석자: 토나가 총독부 학무국장,김대우 사회교육과장 등 조선과 일본의 문예인 30명
음악가: 박경호,이종태,함화진,현제명, 홍영후
홍난파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시점은 대략 1937년 6월입니다. '조선문예회'가 창립했던 시기는 5월입니다.
조선문예회는 총독부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상황에서 총후(전선에 대한 후방기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노래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황민화 과정에서 설립된 관변단체입니다.
홍난파는 분명, 총독부 학무국의 지시로 만들어진 조선문예회의 목적인 '황민화'와 '사회교화'라는 사실을 알고 가입을 했으며, 이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친일로 돌아섰다는 주장과는 뭔가 맞지 않는 대목입니다.
'홍난파의 애국은 일본이었다'
홍난파의 친일 음악인으로서의 활동은 1937년 조선문예회와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는 동우회 사건에서 풀려나오자마자, 193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가요 발표회'를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하자,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凱歌)>에 곡을 붙여 친일가요를 발표합니다.
1937년 9월 30일에는 조선문예회가 신작발표회로서 <황군위문조성-총후반도의 애국가요> 발표회 겸 <시국가요 피로의 밤>을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었는데, 홍난파는<장성(長城)의 파수(把守)>(최남선 작사)와<공군의 노래>(空軍の歌:- - -彩本長夫 작사)라는 친일가요를 발표하였습니다.
1937년 10월 3일에는 경성 고등 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 군사 후원연맹'이 후원하는,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보국대 연주회>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홍난파는 황군을 위문하거나 전선에 대한 후방기지라는 뜻을 가진 '총후'를 만들기 위한 음악적 활동을 아낌없이 펼쳤습니다.
홍난파는 경성방송 교향악단을 이끌면서 1938년 7월 9일 '동요와 합창'이라는 방송에서 <애국행진곡>을 지휘했습니다. <애국행진곡>은 일본인이 작곡한 일본 전통의 전형적인 2박자풍의 곡으로 일본의 제2국가로 불리는 노래입니다.
<애국행진곡>의 내용은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고 약진하자'는 내용으로, 그가 작곡하고 지휘했던 음악 대부분은 '애국' 즉, 일본 천황폐하와 일본을 찬양하며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군국주의 음악이었습니다.
홍난파가 말하는 애국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였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조선의 아픔을 노래한 비운의 작곡가라고 그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홍난파의 대표적인 노래로 아직도 사랑받는 '봉선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곡은 1926년 홍난파가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면서 수록한 노래입니다.
봉선화라는 노래는 사실 홍난파 때문이 아니라 성악가 '김천애' 때문에 유명해진 곡입니다.
1942년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성악가 김천애는 도쿄 히비야 공화당에서 개최한 '전일본 신인음악회'에 하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출연하여 '봉선화'를 불렀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김천애는 봉선화를 계속해서 불렀으며, 1942년 경상남도 삼천포 공연에서도 '봉선화'를 부를 예정이었지만, 일제에 의해 '금지곡'으로 결정, 더는 봉선화를 부르지 못하게 됐습니다.
'봉선화'가 일본에 의해 금지곡이 되면서 작곡가였던 홍난파도 민족음악가로 알려지게 됐지만, 사실 홍난파는 민족음악가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무슨 조선의 아픔을 노래하거나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 고민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는 서양음악의 보급에 앞장선 인물로, 그의 음악관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지완(遲緩)하여(더디고 느려서) 해이하고 퇴영적인(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인용자:노동은 목원대교수) 기분에 쌓여 있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동서양음악의 비교], 1936)
홍난파는 조선 음악이 서양음악보다 뒤떨어졌다는 인식에 사로잡혔던 인물로, 음악의 우열을 가리는 편중된 음악관을 가졌던 인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홍난파가 경성방송국을 통해 국내 최초의 직업 관현악단을 만들고,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세미클래식을 보급한 음악적인 실적은 분명 한국 음악사에 기록될 업적입니다. 그렇다고 친일 행적을 덮을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조선일보는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을 비난하면서 홍난파의 음악이 '나라 잃은 백성의 슬픔과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면서 '단지 일제의 강요에 의해 몇 편의 군가를 작곡했다'고 그를 옹호했습니다.
홍난파를 엄청난 죄인이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무슨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민족음악가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으며,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진짜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이 들으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망언입니다.
난파음악상을 거부한 류재준 작곡가의 수상거부는 개인의 자유이기에 뭐라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홍난파라는 음악가의 실체를 다시 조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음악을 통해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의 논리라면 대한민국이 다시 일본에 침략을 받아도 그냥 황군을 위한 군가를 몇 편 작곡하고 천황폐하를 찬양하는 음악회를 지휘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민족음악가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엠피터는 폭풍 한설이 몰아치는 만주벌판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진짜 독립투사들이 불렀던 독립군가를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진짜 '애국'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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