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는 5일 국무회를 열어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통합진보당 해산안'이 통과되자,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국무회의 직후 곧바로 브리핑했습니다.
황 법무부 장관은 “진보당의 강령 등 그 목적이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반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제반 서류를 갖춰 신속히 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하고 이와 아울러 국회의원직 상실 결정 청구 및 각종 정당활동 금지 가처분 신청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특정 정당에 해산 심판을 청구한 사실을 놓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놀라움이 있습니다. 현재 이석기 의원의 RO 관련 내란음모 사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벌어진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말처럼 이와 유사한 사건이었던 조봉암과 진보당 재판 과정을 통해 정리해봤습니다.
' 이승만의 대권을 위협했던 죽산 조봉암'
죽산 조봉암은 1899년 강화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합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와 싸우다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조직을 주도합니다.
조보암은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되어, 신의주 교도소에서 7년 동안 복역했습니다. 이때 조봉암은 악명 높은 신의주 교도소 복역 기간에 고문과 동상으로 손가락 일곱 마디가 끊어지는 처절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을 주도했지만, 이후 박헌영을 비판했다가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제명을 당하며 공산당과 결별했습니다. 해방 이후 조봉암은 초대 내각 농림부 장관을 하면서 농지개혁이라는 엄청난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은 당시 남한 인구의 70%였던 소작농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진보주의 사회운동가로 이미 '농지개혁'을 주장했던 죽산 조봉암을 초대 내각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지주 세력으로 구성된 한민당은 조봉암이 내놓은 농지개혁안이나 양곡수매제 등을 반대했지만, 소장파 의원들과 조봉암은 지주의 머슴과 같았던 농민을 위해 농지개혁안을 계속 밀어붙였습니다.
이승만은 농민을 표로 보고, 토지에 묻혀 있는 자본을 공업화로 하기 위해 농지개혁을 주장했지만, 조봉암은 노예처럼 살았던 농민의 삶을 바꾸기 위해 진정한 농지개혁안을 추진했던 것입니다.
국회부의장을 지내던 조봉암은 2,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이승만에게 패배했습니다. 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조봉암은 2대 선거 때 받았던 70만 표보다 훨씬 많은 2백16만 표를 획득했습니다.
무효표가 2백만 표 가까이 나왔던 3대 대통령 선거를 놓고 사람들은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으며, 다음에는 조봉암이 되겠다'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농지개혁 등을 통한 조봉암의 정치 철학과 정책은 이승만을 위협했습니다. 이제 이승만은 1960년 벌어질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위협하는 조봉암을 꺾을 비책을 마련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선거에서 이승만은 선출됐지만, 이 선거는 부정선거로 밝혀졌다.)
' 평화통일을 주장했다가 사형당한 조봉암과 박근혜 정권'
이승만 정권의 검찰은 1957년 조봉암을 조총련계 간첩 정우갑과 관련 혐의가 있다고 소환했으나, 대법원은 최종 판결에서 간첩죄에서는 무죄를 판결했습니다.
대법원은 조봉암이 양명산에게 당원 명단을 건네준 사실만 인정해, 징역 5년만을 선고했습니다. 당시 진보당 간부도 모두 무죄를 받았습니다.
1958년 유영진 재판장의 1심 판결이 끝나고 나자 벌어진 일은 2013년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1심 판결 직후 국무회의에서 '조봉암 1심 판결은 말이 안 된다. 이러한 판사를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 판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중지하였다. 헌법을 고쳐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있는 특정정당 해산안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등의 재판이 있기도 전에 통합진보당을 북한과 연계된 종북 정당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958년 반공청년 200여명은 1심 판결 직후 법원에 난입해 난동을 벌였으며, 2013년 일부 자칭 보수단체 등은 통합진보당 해산안을 청원했다가 통과되자, 환영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죽산 조봉암의 사형 판결에 직접적인 증거와 증인이 됐던 인물은 간첩 양명산입니다. 본명 양이섭은 북한의 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고 진술했지만, 사실 그는 남한 HID소속으로 북한을 12번이나 왕래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이면서 '네,네'만을 진술했었습니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재판 중인 이석기 의원의 재판은 아직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이 제공한 녹음기로 녹음했던 제보자의 증인 출석 여부와 녹취록 내용과 발언자의 사실 여부는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봉암은 '근로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대중정당'을 주장했습니다. 현재 통합진보당의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민주정부 수립론'과 유사합니다. 당시 대법원은 진보당의 강령이 무죄라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과 반대되는 '평화통일론'은 결코 위헌이 될 수 없습니다.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이승만 정권의 외무장관이 평화통일 14개조 방안을 주장했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주장했던 '중립국 감시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과 진보당의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남한의 공식적인 입장과 동일)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었습니까?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무조건 북한의 지시를 따르고 종북주의자가 됩니까?
조봉암의 진보당 강령과 주장은 불법성이 문제가 아니라, 차기 대선에서 이승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당해산안은 반대합니다.'
아이엠피터는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생각과 그들의 정치 행동 방식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봉암은 국제정세를 읽으며 제3노선을 주장하며 대중정당으로 거듭나고자 했습니다. 정당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의 모습은 그런 발전과 개혁이 별로 없었습니다.
정당은 국민의 지지에 따라 그 존폐가 결정되는 것이지, 결코 국가기관이 개입하여 강제적으로 그 정당과 당원들의 사상을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통합진보당과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동일시하는 모습이나,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정당 해산안이 토론과 시민 사회의 공론 과정은 물론 대통령도 없이 이루어진 사건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아이엠피터는 통합진보당의 강령이나 그들의 주장이 대한민국을 그토록 위협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심판은 국민이 투표와 지지율로 충분히 내릴 수 있으며, 그것이 민주주의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정당한 절차입니다.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않지만, 통합진보당의 해산안을 반대하는 이유는, 내 생각이 '종북'이라는 단어만으로 언젠가 똑같이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당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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