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사

'내란음모' 남파간첩, 알고보니 북파공작원



국정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당직자, 관련 단체 인사 등 10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일제히 압수수색을 하고, 홍순석 부위원장,한동근 수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상호 경기진보연대 고문 등 3명을 체포했습니다.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을 총책임자로 하는 'OO산악회'가 혁명조직 'RO'를 만든 뒤 모임을 통해 북한과 전쟁이 발생하는 등 유사시에 철도,유류시설 등을 파괴하는 내란을 모의했으며, 북한의 혁명가요를 부르고,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찬양,고무 행위 등의 국가보안법 위반도 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재 많은 언론이 관계자의 말이라며 여러 가지 주장을 기사로 내보내고 있지만, 정확한 팩트는 실제로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엠피터는 언론은 물론이고 국정원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내란음모 혐의'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이 있지만 믿지 않는 이유는 과거 국정원이 이런 식으로 간첩사건을 조작한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 국가전복 인혁당 간첩, 알고 보니 북파 공작원'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하여 관련자 57명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합니다.


김형욱 정보부장은 1962년 남파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우동읍(본명 우홍선) 김배영,김영광,도예종,허작,김한득,박현채 등이 모여 창당발기인 모임을 갖고, '북괴 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했으며, 이들은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고 했다고 발표합니다.

중정은 1962년 5월 북괴간첩 김영춘이 월북하여 '인혁당' 창당 결과를 보고했고, 1962년 10월에는 김배영이 당 자금 수령차 일본을 경유, 월북했으며, 전국의 군,면당과 군소 직장 내에 세포조직을 만들어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반대를 '4.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하여 현 정권을 타도할 목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중정이 발표한 북괴지령과 국가변란의 당위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남파간첩이었던 김영춘과 김배영의 실체가 규명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파간첩이라는 김영춘은 원래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이자 '사회대중당' 후보였던 김상한이었습니다.

김상한은 육군 첩보부대의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돼 1962년 7월 12일 북파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중정은 북파 사실은 몰랐지만, 간첩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중정이 얼마나 대북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단순히 북에 넘어갔다는 이유로 그를 남파간첩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중정은 남파간첩 김배영이 월북했다고 발표했지만, 김배영은 인혁당 사건이 터진 후 11월에 월북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1967년 10월 공작원으로 남파됐다가 검거돼 1971년 사형을 받았는데, 중정은 1974년 제2차 인혁당 사건에도 죽은 그를 무덤에서 꺼내 간첩 사건을 조작합니다.

중앙정보부는 북파를 남파로 월북하지도 않았던 시기에 월북했다고 거짓을 말하면서 인혁당 사건을 '북괴의 지령'을 받은 국가변란 사건으로 조작했었습니다.

'간첩으로 체포된 23명 중 간첩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 사이에 7차에 걸쳐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 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중정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문화예술인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6.3 학생운동 주역인 김중태·현승일 등을 포함, 교수·예술인·의사·공무원 등 194명이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활동을 했고, 일부는 입북하여 노동당 입당과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황성모 교수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내란음모 및 선동시위 등으로 정부전복을 모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중정은 공작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서를 내란을 위한 증거라고 내놓았지만, 사건의 결과는 중정의 처음 주장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중정은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이 북한의 특수교육을 받고 북한의 지령을 받은 후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 이들이 했던 일이라고는 3~4명이 남한에 왔다는 안착신호를 보낸 것과 북한 방송을 1~2회 청취했을 뿐입니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203명중 66명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23명을 간첩죄, 간첩미수죄, 국가전복 내란음모죄로 기소했지만, 이들 중 간첩죄와 내란음모죄를 적용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해외에 살면서 북한과 접촉하고 북한 방송을 들은 사실은 있지만, 이들이 중정의 발표처럼 북한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국가전복을 꾀하고 내란음모를 했다고는 전혀 볼 수 없는 과장된 '간첩 조작'사건이었습니다.

' 정권퇴진과 부정선거 폭로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간첩사건'

아이엠피터가 국정원의 전신인 중정의 여러 용공조작 사건 중에서 특별히 인혁당과 동백림사건을 거론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 사건이 벌어진 배경을 이해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민정이약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됩니다. 이후 일본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은 정권퇴진 요구로 이어지게 됩니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박정희가 내세우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른 후 거리로 나왔고, 정부는 이를 '체제 전복 기도'로 간주하고 학생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했습니다. 그러나 담당판사가 영장청구를 기각하자, 무장군인이 법원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국민적 공감대와 지지까지 얻자 정부는 6월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런 학생운동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 원인이라고 발표합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자신을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국민적 지지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작한 사건 사건이 바로 '인혁당' 사건입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였습니다. 1967년 재선에 성공했으나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을 위해서는 반드시 개헌 가능선인 3분의 2를 초과한 의석을 확보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아예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하는 등 선거법 위반을 태연히 자행하면서 금품살포는 물론이고 관권 동원 등 온갖 부정선거를 자행했으며, 이에 따라 개헌 가능선인 156석을 확보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 야당과 대학생들은 6.8 부정선거에 대한 대규모 규탄시위를 전개했으며, 박정희는 30개 대학과 148개 고등학교를 임시 휴업시켰습니다.

중앙정보부는 6.8부정선거 시위가 확산되자, 1967년 7월8일부터 17일 사이에 무려 7차에 걸친 '동백림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후 6.8부정선거 시위는 간첩단 사건으로 신문지면에서는 점차 사라지게 됐습니다.

' 박정희 정권과 박근혜 정권, 왜 이렇게 비슷하지?'

아이엠피터가 인혁당과 동백림 사건을 사례로 들은 이유는 박정희가 간첩조작 사건을 벌인 이유와 지금 박근혜 정권의 '내란음모' 의혹이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혁당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는 굴욕 한일회담으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 퇴진 운동이 확산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지금 촛불집회의 참석자가 점점 늘어가는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동백림 사건이 일어났던 1967년에는 6.8부정선거로 야당과 대학생이 시위를 시작했었습니다. 중정은 부정선거를 은폐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동백림 사건을 과대 포장하여 발표했습니다.

지금 촛불집회는 국정원의 대선개입으로 부정선거와 박근혜 책임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정원은 국정조사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 사건을 터트렸습니다.

자신의 불법적인 행위와 통치를 위해 간첩사건을 조작하고 이용했던 수법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삼선개헌,10.2항명사건,대선,총선 등 중요한 정치 사안때마다 정치인을 사찰하며 정치자금,이권청탁 등의 비리사실을 통해 회유, 협박하기도, 용공조작과 통치자의 통치자금을 조달하고 관리하는 등의 정치공작을 벌여왔습니다.

아이엠피터가 정치사를 공부하면서 놀란 것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한국 정보기관이 관여하지 않은 사건이 없으며, 결국 한국 현대정치사를 알려면 정보기관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라는 사실입니다.
 


국정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현직 국회의원와 관련자를 체포, 압수 수색하는 일이 진짜 내란 사건을 조사하고 간첩을 적발하기 위하고 있다고 백퍼센트 믿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 국정원이 했던 대부분 간첩사건이 정권을 유지하고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작됐다는 증거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집니다. 그러나 진실을 묻어두려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그 진실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불편한지는 역사가 알려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