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백바지 '유시민'의 정계 은퇴와 '미완의 정치'



유시민 전 의원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유시민 전 의원은 2월 19일 자신의 트위터에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찾고 싶어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납니다"라고 썼고 "열에 하나도 보답하지 못한 채 떠나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라며 정계 은퇴의 뜻을 밝혔습니다.

유시민 전 의원의 정계 은퇴를 놓고 다양한 해석과 전망이 나오지만, 오늘 '아이엠피터'는 그가 왜 정치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남긴 것을 중심으로 말해보고 싶습니다.

' 서울역 회군을 반대했던 유시민'

유시민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출신입니다. 그는 1980년 민주화 운동이 거세던 5월 15일 서울역에서 수만 명의 대학생이 모여 열린 '계엄해제와 신군부 퇴진' 시위에 참가합니다.

▲서울역을 중심으로 최소 10만 명의 시위대가 오여 '신군부 퇴진'을 요구했던 1980년 5월15일


당시 18개 대학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계속할 것인가 아닌가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데, 이때 심재철은 시위 해산을 주장했고, 유시민은 결사항전을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설전은 시위 도중 내내 계속됐고, 결국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이 서울역 광장 구석에 있던 임시회의처 통학버스 위로 올라가 "오늘 시위는 끝났고 모두 학교로 돌아가고 내일을 기약하자"고 말함으로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집니다.

당시 신현확 총리는 서울역 시위대 해산을 노리고 '늦어도 연말까지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 상반기에 '양대선거'를 실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당초 약속을 추호의 변동 없이 지켜가고 있다'며 '시국에대한 국무총리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5월16일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가 소집됐으나 경찰의 난입으로 중단되었고,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대한민국 전 지역으로 확대됐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18일 광주는 우리 역사에서 기억하기 어려운 아픔을 겪기 시작합니다.

▲광주에 진입한 공수부대.


'아이엠피터'가 유시민을 말하면서 '서울역 회군'을 먼저 논하는 이유는 당시 '서울역 회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라는 생각을 늘 해보기 때문입니다. 광주만큼 서울에서도 무자비한 진압에 대한 유혈사태는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은 광주처럼 그토록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수십 년간 매도되지는 않았으리라 봅니다. 당시 서울은 수많은 외신기자들이 있었고, 광주처럼 모든 지역을 봉쇄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유시민은 '서울역 회군'을 통해 기성 정치인이 가진 이중성과 그들의 태도에 대응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고, 유시민은 구속되어 1년 6개월 형을 받고, 1985년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세상에 알립니다.

▲법정에 출두했던 유시민


유시민은 '항소이유서'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 형량의 과중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거짓 선전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요구하기 위해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고 밝혔습니다.

'아이엠피터'는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서 보여줬던 폭력을 추호도 잘했다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그 시대 우리 사회가 보여줬던 혼란과 아픔이 기가 막히게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에 나와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 권력은 정당하게 처벌받지 않는 사실을 빗댄 그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권력의 폭력적인 수단이 어떻게 사회를 도덕적으로 망가뜨리고 대한민국 사회가 불법과 분열,대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 타고난 작가,그리고 논객 유시민'

유시민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그의 글에 감탄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의 글솜씨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은 그가 수배 중이던 시절 썼던 MBC 월화미니시리즈 8부작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는 멜로 드라마의 각본을 썼던 점입니다.

▲드라마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에는 아직도 극본 유지수라고 나온다. 출처:다음 영화


뽀글이 파마를 하고 방송사를 출입하며 '유지수'라는 가명으로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라는 드라마의 극본을 썼던 유시민은 그 후에도 '신용비어천가'라는 단막극의 각본도 썼습니다.

독일 유학 후에 귀국한 유시민은 각종 언론사에 칼럼니스트로 글을 쓰기도 하고, '100분 토론'의 사회자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인기가 높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그가 썼던 글들이 보여준 예리함과 말솜씨는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입을 열면 원고 없이 몇 시간 동안 계속 말을 할 수 있는 그의 해박함과 글 속에서 보이는 예리함과 속 시원함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그가 정치에 입문할 수 있었던 '인기'의 배경이었음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 정당 브레이커 유시민'

유시민은 1988년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들어왔다가 2002년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 앞에 서는 심정으로'라는 글을 통해 절필을 선언하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유시민 전 의원을 '정당 브레이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유시민 전 의원이 소속된 정당이 분열되는 일들이 많아 붙여진 부정적인 별명 중의 하나입니다.


유시민은 2002년11월 '개혁국민정당'을 시작으로 열린우리당 창당 주도(2003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경선 참여(2007년), 국민참여당 창당(2009년), 통합진보당 창당과 탈당(2012년), 진보정의당 창당(2012년) 등 정말 많은 정당을 창당했습니다.

그가 정당을 창당하고 탈당하는 모습을 빗대 사람들은 그를 '정당 브레이커'로 칭하기도 하지만 그가 수많은 정당을 창당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정치를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에 있기도 합니다.

▲국회 개원때 하얀색 바지에 노타이로 등원한 유시민.


고양 덕양구갑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된 유시민은 첫 국회 등원때 정장이 아닌 흰색 면바지에 노타이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백바지'라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동료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에게 '국회를 뭐로 보느냐'는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정치를 딱딱하게 풀려고 하지 않았기에 정당을 창당하고 탈당하는 일에 그리 거리낌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무슨 목적으로 정당을 자꾸 만들었는지에 대한 그가 가진 '정당'에 대한 개념입니다.
 
' 삼자구도를 통한 '정치혁신'을 꿈꾸었던 유시민'

유시민은 “87년 체제가 만든 ‘결선투표도 없는 대통령선거와 비례대표 비율이 매우 낮은 소선거구 국회의원선거 제도’가 기존 기득권을 쥐고 있는 양당이 계속 권력을 나눠 먹게 한다”며 “양당구도와 지역주의가 결합해 완강하게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대한민국 정치판의 '양당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에게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념을 떠나 권력을 나눠 가지며 대한민국 정치를 가로막는 정당이었을 뿐입니다.

▲소선거구제와 양당체제 현상을 보여주는 총선 결과. 출처 민주주의복지사회연대


유시민이 생각하는 정치 혁신의 시작은 현재의 양당 구조를 개혁하는 일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민주당에 합류하지 않고, 국민참여당에 갔고, 야권대통합보다는 민주노동당 등 소수 진보세력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정당 브레이커'라는 말 속에는 자꾸 왜 정당을 깨느냐는 질타가 있겠지만, 한편으로 유시민에게는 대한민국의 양당 체제에서는 결코 민주주의가 진보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실천하려는 방편이 아니었느냐는 생각도 해봅니다.

유시민의 정치 중에서 '노무현'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지만, 한편으로 유시민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이제 사라져야 할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즉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가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의 복지국가를 진행하는 밑거름이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양당 체제를 무너뜨리고 최소 삼자 구도 이상의 정치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현행 정치에서 '양당 체제'로는 절대로 다양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제3당'이 나올 수 없고, 이는 그가 끊임없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고 소수의 세력 속에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다는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 정치인 유시민이 남긴 것들'

'아이엠피터'는 유시민을 평가한다는 생각이나 그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려는 의도로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보 세력 간에도 유시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이엠피터'는 그의 공과를 따지기 보다 그가 원했던 정치의 한 단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취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글을 쓴 것입니다.

▲보건복지부장관,대선경선 출마,경기지사 선거 등 다양한 정치 활동을 벌였던 유시민.


그가 생각했던 정치, 정당 구조, 정책, 모든 것이 완벽하거나 옳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그가 했던 말에도 모순이 있고, 그의 정치 행동과 정당 활동에도 문제점은 분명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세상 속에는 분명 새로운 정치를 향한 갈망과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생각이 전부 옳은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사회 속에서 정치도 분명 기성 정치와는 차별된 어떤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고, 그 안에 유시민이라는 인물이 있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유시민의 '캠프가 망했어요'라는 동영상을 보면 그의 인기와 착각, 그리고 그가 원하는 모습을 조금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통해 정치하려고 했지만, 기존의 정당 구조 속에 시민의 참여가 없다면 성공하기 어렵고, 현실과 이상적인 정치가 얼마나 많은 간극을 보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쩌면 유시민이라는 인물은 '실패한 정치인'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공보다는 그의 실패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졌던 정치에 대한 꿈, 열망이 어떻게 무너지기도, 어떻게 성공하기도 했는지를 통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정치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하는지를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장에서의 유시민.


이제 '정치인 유시민'은 우리 곁을 떠납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은 그를 아쉬워할 것이고, 그를 비판했던 사람은 그의 정계 은퇴를 그저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그저 안타까워하거나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 정치가 어떻게 변화돼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라는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인용한 그의 '항소이유서'처럼 열정을 가진 시민들의 정치 참여와 기성 정치와는 다른 제3의 모습이 대한민국 정치에 자꾸 등장해야 합니다. 떠나는 그를 보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당신이 보여준 미완의 정치를 이제 우리가 완성해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