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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노무현은 '나쁜 대통령', 나는 참 '좋은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새 정부 들어 첫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대국민담화문을 통해 박 대통령은 현재 정치 사안에 대해 하나하나 짚으면서 강하게 야당을 비난했는데, 그녀의 말을 듣다 보면 대통령이 됐다고 갑자기 자신의 과거는 잊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됐습니다.

대국민담화문 속에 나온 박 대통령의 모순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겠습니다.

' 난 절대 양보 못해. 문제는 야당이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문에서 현재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조직법'이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마치 박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 대한민국 정치가 완전히 엉망인 듯 보이지만, 사실 '정부조직법'은 역대 정부 어디서나 협상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보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에 정부조직을 개편하려고 했다.


김영삼 정부는 동력자원부와 체육청소년부 폐지에 대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새 정부 출범 이틀 전인 1993년 2월 23일에서야 겨우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21부처를 16부처로 축소하고 대통령직속 기획예산처와 중앙인사위원회를 신설하겠다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하고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당시 거대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결사반대해 중앙인사위원회 신설 계획은 사라지고, 기획예산처는 산하 예산청으로 기능이 분리됐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통일,정보통신,해양수산,과학기술,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했지만, 참여정부의 반대로 여야가 서로 대치하다가 결국 출범 나흘 전인 2월 20일 서로의 입장을 양보하는 차원에서 정부조직법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새 정부 출범 이후에도 통과되지 못한 것은 분명 헌정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문제는 역대 정부 모두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대립했지만, 결국 통과된 이유가 서로 간의 양보 때문이라는 점을 박 대통령은 기억해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정기 주례회동을 통해 정부조직법과 IMF 문제를 지속해서 논의했었다. 출처:연합뉴스


김대중 당선인은 김영삼 대통령과 주례 회동을 통해 해양수산부 폐지 관련을 논의했고, 이명박 당선인과 참여정부도 각자가 주장했던 여성가족부 폐지와 해양수산부 존속 입장을 거둬들였습니다. 즉 '정부조직법'이 통과되려면 서로가 조금씩 양보해야 하건만, 박 대통령 자신은 전혀 양보하지 않고 오로지 야당만 양보해야 한다는 이런 독선을 가지고 모든 잘못을 야당에 미루고 있습니다.

다른 역대 정부보다 훨씬 늦게서야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제출해놓고 '나는 양보하지 못하니 너만 양보해라'는 정신은 '협상'과 '양보', '합의'가 근간인 민주주의 방식이 아닌 독재적 발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오만입니다.

' 노무현 대통령 초대는 불참하더니 이젠 안 온다고 비난'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조직법 개정안' 통과를 위해 여야 대표들과의 회동을 추진했지만, 무산됐습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을 대국민담화문에서 말하며 자신은 충분히 노력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새 정부가 국정운영에 어떠한 것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여야 대표들과의 회동을 통해 발전적인 대화를 기대했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대해 큰 걱정과 함께 책임감은 느낍니다" (3월 4일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문 중에서)

그런데, 사실 이번 청와대 회동은 절차상 굉장히 문제가 많았던 요청이었습니다. 우선 청와대 여야 회동이라는 초청을 일방적으로 야당에 통보해놓고, 언론에는 마치 박근혜 대통령이 간곡하게 부탁하는 식의 여론몰이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겠다는 권위주의적 모습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에 이런 회동을 비난했던바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5년 6월 한나라당 대표 시절, 윤광웅 국방부장관 해임과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 협조를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여야 지도부를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으나 "전날 갑자기 만찬에 참석해달라고 했다"면서 불참했습니다.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불참은 대통령 권위주의에 대한 타파 이유이고, 지금 야당의 불참은 국민을 볼모로 한 인질극이라는 식으로 박 대통령은 몰고 있는 것입니다.

' 신상털기 인사청문회? 문제는 돈이야'

박근혜 대통령은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의 사퇴를 언급하며, 그의 사퇴가 마치 대한민국 정치의 문제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금 전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가 사의를 밝혔습니다. 미래성장동력과 창조 경제를 위해 삼고초려해 온 분인데 우리 정치의 현실에 좌절을 느끼고 사의를 표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새 시대를 열어가고,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인적 자원이 가장 중요합니다." (3월 4일 박근혜 대통령 대국민담화문 중에서)

박 대통령은 김종훈 장관 내정자의 사퇴가 '우리 정치의 현실에 좌절을 느끼고'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김종훈 내정자의 사퇴는 결코 대한민국 정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김종훈 장관 내정자의 사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대한민국 야당이 아닌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김 내정자의 부인은 만약 그의 남편이 미국 국적을 포기하면 내야 하는 1천억원의 '국적포기세'(미국 시민권자와 영주권자가 국적을 포기할 경우 보유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재산을 양도하는 것으로 보고 15%의 국적포기세를 내야 한다)를 내세워 장관직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조원대의 재산을 포기하기 어려웠던 김 내정자의 부인은 IMF 당시 부자들이 외환위기를 틈타 나온 매물을 낙찰받아 재산을 불린 수법과 동일한 방식으로 서울 청담동 건물을 사들였었습니다. 단순히 미국에만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 한남동을 비롯한 국내에 보유한 토지,건물,예금,주식 등을 '인사청문회'에서 공개해야 하는 점을 들어 김 내정자 부인은 남편의 장관직 사퇴를 종용했습니다. 

<혹시,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내정자가 확실히 미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나요?(포기 예정과 국적 포기는 엄연히 다릅니다) 국적을 포기하지도 않고 한 나라의 장관이 된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장관 사퇴는 본인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6년 2월 김우식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 후보자,이종석 통일부 장관 후보자,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절대 부적격>을 외쳤던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국무위원 청문회의 입법 취지를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데 문제가 있다" (2006년 2월)
"신상털기식 검증은 문제가 있다. 이런 상황에 누가 청문회를 하려고 하겠느냐"(2013년 2월)


자기가 반대하면 인사청문회를 따르는 것이고 남이 반대하면 '신상털기'라는 그녀의 '착각'과 삐뚤어진 사고방식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자꾸 인사청문회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국과 한국의 인사청문회를 비교해 놓은 아랫글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미국 인사청문회 기준으로 보면 박근혜 정부 장관 내정자는 아예 후보도 될 수 없습니다.>

[정치] - '미국 인사청문회 VS 한국 인사청문회'절차와 특징

김종훈 장관 내정자는 사퇴하면서 '대통령의 면담조차 거부하는 야당과 정치권의 난맥상을 지켜보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지켜내기 어려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보면 마치 한국 정치가 완전 후진국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낙후된 정치를 하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전화하는 모습. 출처:SBS 뉴스

미국 대통령은 어떤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 지도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사전 작업을 벌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미국의 가장 큰 문제인 '재정 절벽'(fiscal cliff)을 타결하기 위해 벌었던 2012년 12월 회동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겨울 휴가를 떠나기 전에 상원의 해리 리드 민주당 원내대표와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하원의 존 베이너 의장 등 지도부에 전화를 걸었고, 의회 지도자들과 만나기 위해 하와이 겨울 휴가를 예정보다 빨리 끝내고 백악관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 대통령과 의회 지도자들이 협상했다고 합의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언제나 지루한 협상과 줄다리기, 대치를 통해 법률안을 통과하거나 정책을 운용하기도 합니다.>


대통령과 국회는 어떤 명령을 내리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의회 지도자들에게 항상 협조를 구하고, 그들과 개별 접촉을 통해 설득하고 협상합니다. 이에 반해 한국 대통령은 전날 청와대 오찬을 제시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은 할 만큼 했는데 야당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변명합니다.

▲대국민담화문 발표 당시 박근혜 대통령 모습. 출처:오마이뉴스 권우성


대국민담화문은 국민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국민을 향해 표독스런 표정과 모습으로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강조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도대체 국회와 국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나라당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인사청문회는 모두가 법률에 따라 절차를 밟고 상대방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 눈에는 하루빨리 자신의 정부만 세우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 독기어린 표정으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독설을 날렸던 그녀가 할 일은 국민을 볼모로 자신을 좋은 대통령으로 미화하는 일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의회정치','국회법', '협상의 기술' 등에 관한 책이라도 읽고 국민 앞에 나서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