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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인제' 노무현과 시작은 같았지만, 그 끝은?



새누리당과 합당한 선진통일당 이인제 대표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부패혐의에 쫓겨 자살했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인제 대표는 어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와 함께 참석한 새누리당 세종시당 선대위 발대식에서 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를 비난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끄집어냈습니다.

"야당의 한 사람, 오직 정치적 경험은 대통령 비서라는 것밖에 없으며, 자기가 모시던 대통령이 부패혐의에 쫓겨 자살했다. 정치적으로 영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와서 대통령을 하겠다고 큰소리 치고 있다" (이인제, 박근혜와 참석한 새누리당 세종시당 선대위 발대식)

이인제가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을 꺼냈지만, 이인제의 발언은 그의 정치 인생과 비추어 볼 때, 왜 이렇게까지 추하게 사느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이인제의 정치인생을 돌이켜보면서 정치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과연 어떤 정치인이 대한민국에 필요한지 생각해보겠습니다.

' 이인제,노무현, 정치인으로의 출발은 같았다'

이인제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의 출발은 비슷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인제 모두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인제가 정치에 나서게 된 배경은 3김 시대로 이어지는 구 정치세력을 쇄신하려는 국민의 열망을 정치권이 보여주기 위해 영입된 젊은 정치인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13대 총선에 출마, 이인제는 안양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에서 각각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이 두 사람의 정치운명이 바뀐 것은 바로 연합정치 중 가장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 '3당 합당'이었습니다.

▲ 3당 합당 후 열린 축하연의 노태우,김영삼,김종필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노태우의 민정당과 야당이었던 김영상 통일민주당,김종필 공화당이 합당해 만든 민주자유당은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려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군사정권 청산 열망을 단칼에 베여버리는 야합이자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들의 밀실정치로 일어난 대한민국 정당 정치 최악의 사건이었습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125석을 얻은 민정당은 국정감사 부활 등으로 야당에 정국주도권을 빼앗겨 고전하자, 노태우는 처음에는 평민당 김대중 총재와 합당을 시도했으나, 김대중 총재가 거부하자, 제2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과 공화당을 모두 끌어들여 3당 합당을 추진한 것입니다.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을 위해 해체하는 자리에서 오른손을 번쩍 든 노무현 의원, 출처:김종구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3당 합당을 위해 '구국의 차원에서 통일민주당을 해체합니다.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 이라고 선언하는 순간에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은 오른손을 번쩍들며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을 정치인으로 만들어준 거대 정당의 보스를 향해 반기를 들었던 초선 의원 노무현은 그 후 '꼬마 민주당'을 결성하였고, 이인제는 김영상을 따라 218석을 보유한 거대 여당으로 한순간에 바뀐 민자당에 입당합니다. 

정치계의 거목으로 불리던 김영삼에 의해 새로운 시대의 젊은 정치인으로 정치계에 입문했던 이인제와 노무현 의원은 그 후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인제는 노동부장관,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면서 탄탄대로를 걸었고, 노무현 의원은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부산에서 출마했지만 떨어져 '바보 노무현'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 이인제, 불복, 탈당, 창당으로 권력을 찾아 헤매다'

이인제를 가리켜 '철새 정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무수히 많은 당적을 바꾼 인물인데, 단순히 당적을 바꾼 이유만으로 그를 평가하기보다, 왜 그토록 당적을 바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인제의 당적변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정당에 입당했다가 탈당한 이유입니다. 그는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옮긴 뒤 탈당을 했는데, 이유가 1997년에 열린 신한국당 15대 대선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했기 때문입니다. 초반 이회창에게 열세였던 이인제는 그 후 지지율이 높아졌지만, 결국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이인제는 그해 9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15대 대선에 출마했고, 득표율 19.2%를 획득했습니다.

2002년 이인제는 김대중 정권의 여당이었던 새정치민주당의 16대 대선 경선에 출마합니다. 여기서도 처음에는 이인제 급부상론을 타고 큰 기대를 모았지만, 또다시 노무현 후보에게 패합니다. 이후 경선에 불복하여 탈당,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합니다.

그는 자민련에서도 나와 국민중심당에 있다가 다시 또 민주당에 들어가서 조순형,김민석 등과 당내 경선을 벌여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득표율 0.7%를 획득하며 대통령 선거와는 멀어지게 됐습니다.

이인제가 당을 여러 번 바뀐 배경에는 대통령 후보를 위한 경선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경선에 출마했다가 지면, 탈당하여 창당하거나 다른 정당에 입당했던 그의 정치 인생은 나중에는 국회의원 공천 탈락으로 무소속 출마까지 이어집니다.

정치인이 당적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인제는 철저히 '대통령병에 걸린 환자'처럼 대선을 염두에 두고, 힘 있는 정당을 쫓아다녔고, 그런 기회가 사라지면 여지없이 당을 박차고 나와 다른 정치 세력에 빌붙어 살아왔습니다.

' 노무현은 왜 1997년에 대선 출마를 검토했는가?'

우리가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처음 대선 출마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노무현 대통령은 1997년에 대선 출마를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1997년 9월25일자 한계레 기사


1997년 9월25일자 한겨레 기사를 보면 노무현 전 의원이 그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심각히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노무현 전 의원은 1997년 대선출마를 검토했을까요? 바로 '이인제식 세대교체'를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협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의원은 3당 합당 때 명분을 버리고 김영삼 대통령을 쫓아간 이인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에서 김대중이 아닌 이인제를 대선후보로 지지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그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대선출마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이런 노무현의 결심은 결국 통추가 이인제 지지를 철회하게 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인제와 같은 사람을 견제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가 쓴 칼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뢰는 정치노선 이전의 것"

신한국당 경선대회가 끝난 이후 신한국당이 심상치 않다.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자들이 이회창 당선자에 대해 협력하기보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1일 우리는 장장 10시간35분에 걸친 신한국당 전당대회 장면을 생중계 방송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패자와 승자 모두가 전당대회의 결과에 승복하는 의미에서 손을 잡고 전당대회장 단상에 나섰을 때 신한국당 1만2000여 대의원들이 보여주었던 그 환호와 열광의 소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경선 과정에서 후보들은 설령 패배한다 해도 당에 남아 당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어느 후보는 경선 전당대회가 끝난 바로 다음날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앞으로 도정에 온 힘을 쏟고 연말 대선에서 신한국당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패배한 신한국당 대선 후보자들의 행보가 우리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인제 경기도지사의 경우, 지난 주 "이회창 당선자는 3김과 다를 바 없다. 이 경우 어떤 중대한 상황이 벌어질 지 모른다. 역사의식이 있는 나로서는 3김과 똑같은 정치 지도자의 출현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한동 후보의 경우 선거대책위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 있다. 또 이수성 후보는 본인이 최근 보여주고 있는 언행의 진의가 어디에 있든 간에, 경선이 끝나자마자 두 야당 총재를 집으로 방문하고 미국을 방문해서는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선 호남 출신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을 새삼스럽게 거론했다고 한다. 결국 경선에서의 패배를 승복할 수 없고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는 것으로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결론부터 말해 나는 이런 일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신한국당 경선이 한창일 때 한 언론 매체를 빌어 깨질 당은 빨리 깨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책과 노선이 다른 사람들이 무조건 권력을 잡겠다는 생각 하나로 동거해온 신한국당은 빨리 깨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당의 총재가 금융실명제를 주장할 때 당의 일부 세력들은 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딴죽을 거는 당, 오로지 권력을 잡아야겠다는 욕심 하나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던 사람들과 그 법을 만들고 강력한 시행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한 지붕 한 식구가 되어버린 당, 그런 당은 이제 그만 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신념이나 정책, 노선이 아니라 무조건 권력만 잡고 보자고 뭉치는 정치 행위는 나라를 위해서나 국민을 위해서나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대선 후보자들이 뒤늦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과 노선을 앞세워 "이제라도 당을 깨서 내 갈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처음부터 경선에 참여하지도 말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자들은 경선 결과에 승복하기로 약속하고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승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국민 앞에서 단합과 결속의 포옹까지 했었다. 그것은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겠다던 애초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국민 앞에서 다시 한번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국민 앞에서의 공개적인 약속조차 하루도 지나지 않아 뒤집어 진다면 우리가 조만간 보게될 우리의 사회 모습은 어떤 것이겠는가.

그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회, 모든 약속은 유리하면 지키고 불리하면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이런 사회가 아닐까.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고 우리 사회의 기준이 되어야 할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이 하는 말, 그런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 세대는 사회를 배우게 될 것이고 국민은 사회생활의 가치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이야말로 경선 후보자들이 대통령이 돼서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욱더 값지고 귀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뢰라는 가치는 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며 그것은 정치노선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불리함과 억울함이 있다 해도 승자에게 승복하기로 했던 원래의 그 약속을 지키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개혁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 노무현 변호사·국민통합추진회의 상임집행의원 (97년 8월 4일자 <한국일보> '아침을 열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인제라는 인물이 정치개혁 연합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인제의 인물을 그때에 벌써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인제라는 인물이 어떤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을 보면서 과연 이런 인물이 지지하는 대선 후보가 올바른 인물인지 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신뢰라는 가치는 한 사회의 가장 중요한 토대이며, 그것은 정치노선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1997년 칼럼을 보면서, 신뢰가 없는 인물이 과연 신뢰있는 인물을 선택했는지, 과연 국민이 그의 말을 믿겠느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치인의 인생을 보면 그가 원하는 정치 철학을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그 정치인들이 모인 곳의 정치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인제는 '15년 만에 어머니의 당으로' 돌아왔다고 자랑하고, 새누리당은 친정집에 딸이 돌아 왔다고 반가워했습니다.

이인제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막말하기 이전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삐뚤어진 권력 욕심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권력을 위해 신뢰를 저버린 자들이 모인 새누리당은 그를 반겼을지 모르겠지만, 국민은 이미 그의 모습을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같은 시기, 비슷한 모습으로 정치를 시작한 노무현과 이인제, 한 사람은 영원히 국민의 마음속에 기억될 것이고, 다른 사람은새누리당의 몰락 이후에 다시 탈당,창당,입당이라는 새로운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하여, 국민으로부터 비웃음을 받으며 인생을 마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