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노무현 대통령은 왜 경찰청장을 해임하지 않았나?



2005년 12월 27일 노무현 대통령은 직접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해 11월 15일 쌀협상 비준반대 시위 도중에 전용철,홍덕표 두 농민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과였습니다.

전용철 씨는 WTO 쌀협상 비준안 국회처리를 반대하는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의 과잉진압에 머리를 구타당했습니다. 귀가 후 몸이 안 좋아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심각한 뇌출혈이 발견됐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뇌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11월 24일 사망했습니다.

전라북도 김제시 홍덕표씨 또한 같은 날 서울에서 열린 전국농민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한 달이 넘게 사경을 헤맸고, 12월18일 '경수 손상에 의한 폐렘에 따른 폐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이 두 농민의 죽음은 참여정부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었다는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전용철,홍덕표 씨의 사망사건으로 전국에서는 경찰 책임자 처벌과 경찰청장 해임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연일 계속됐습니다. 

역대 정권에서는 이런 사망사건에 대해 총리 선에서의 담화문 발표나 사건해결용 책임자 처벌 내지는 해임 발표가 전부였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직접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문제를 얼마나 마음속 깊이 고민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대국민 사과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 시위진압 관련 대통령의 공식사과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공식사과는 1997년 조선대생 류재을군 사망 사건 이후 처음이었고, 12월 19일 '농민시위 사망 관련 정부 입장'에서 이해찬 총리의 공식사과가 있었는데도 다시 대통령이 직접 사과문을 발표한 보기 드문 사례였습니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은 정권의 실패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극히 제한적이고 신중하게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총리의 정부 차원 공식사과가 있음에도 다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함으로, 사망한 농민에 대한 진정한 사과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 직설적인 사과

보통 정부의 공식 사과문은 이해찬 총리의 "최근 시위에 참석했던 농민들의 일부가 부상을 당하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 데 대해 매우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라는 발언처럼 '안타깝다','가슴 아프다'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사죄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위로 말씀을 드립니다. "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머리 숙여 사죄','깊은 사죄 말씀'이라는 표현을 통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과문의 범위를 넘어선 사과를 직설적으로 했습니다. 

○ 경찰 공권력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대국민 사과문에서 경찰 공권력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밝혔습니다.

"또 공권력도 사람이 행사하는 일이라 자칫 감정이나 혼란에 빠지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인데, 폭력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이 이와 같은 원인된 상황을 스스로 조성한 것임에도 경찰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국민사과문 말미에 집회 참가자의 쇠파이프 폭력시위도 언급했지만, 그 전에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이므로 공권력 행사는 어떠한 상황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에게 경찰의 과잉진압은 아무리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시위라도 용납될 수 없는 잘못된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그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국민이 피해를 보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줬던 대통령'

 이토록 경찰의 잘못을 인정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뜻밖에 경찰청장을 해임하지는 않았습니다. 시민 사회 단체와 노동계가 노동 탄압 정권이라고 그토록 비난하고 있으며, 경찰청장 해임을 요구했는데 왜 노 대통령은 허준영 경찰청장을 해임하지 않았을까요?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다양한 정부부처의 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경찰이었습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경찰이 권력자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 경찰이 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경찰은 앞으로 절대 정치적이거나 정치적인 판단을 담은 보고를 하지 말라, 정책 정보의 질을 높여야 한다" (2003년 3월24일 행자부 업무보고)

" 우리 경찰은 한때 업무수행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해 국민을 실망시킨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정중립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국민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정권을 위한 경찰이 아니라 진정 국민을 위한 경찰로 거듭난 것입니다" (2003년 3월20일 경찰대학 졸업식 축사)

이렇게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원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두 가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주었습니다. 하나는 경찰총장의 '인사청문회'였고, 두 번째는 '임기제 보장'이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법, 참여정부 신설된 11조 5항의 경찰청장 임기


특히 2003년 12월 31일 경찰법 제11조의 개정을 통해 시행된 경찰청장 임기제는 일정 기간 임기를 보장해 줌으로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가능성을 높여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든 정책을 내가 파기할 순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두 농민이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했고,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까지 했습니다. 대부분의 역대 정권에서는 경찰청장 해임으로 국면을 전환하려고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해임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 문:어제 국가인원위원회가 경찰의 책임을 물어서 서울경찰청장과 차장 등 실무지휘자에 대한 문책을 권고했고 대통령께서도 오늘 응당한 책임을 묻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경찰 총수인 허준영 총장의 책임론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달라.

▲ 답:허준영 청장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라는 판단을 하기 전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도상 대통령이 경찰청장에 대해서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점에 관해서 여러분들은 제도를 어떻게 보고 계시나?

국면전환용 경찰청장 해임을 하지 않은 이유가 이 답변에 나옵니다. 그것은 대통령이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나 권한이 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가 만든 법으로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경찰청장을 해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임기 보장과 책임의 사이에서 12월 29일 허준영 경찰청장이 사표를 제출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수리하면서 경찰청장 해임요구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잘못은 잘못이지만 원칙은 지킨 대통령'

저는 그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폭력시위도 문제였지만, 그것이 경찰이라는 공권력이 사람을 사망시킬 정도로 진압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봅니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노무현 대통령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경찰이 공권력을 통해 국민을 사망케 했다는 점은 '깊은 사죄'라는 표현과 함께 머리를 숙이게 하는 크나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잘못은 잘못이고 법으로 보장된 경찰청장의 임기는 그대로 보장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지녔고, 그것이 경찰의 중립성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검찰,국방, 정보,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정치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말 한마디에 법과 원칙을 버리고, 정치적 판단과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경찰, 정치검찰, 정치군인 등을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사건은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공격을 받는 것을 알면서도, 본인이 만든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그의 인간적인 고뇌가 드러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여성 평화활동가를 연행하는 경찰의 모습 출처:민중의 소리



지금 제주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강정마을에는 온통 경찰들의 무법과 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노벨 평화상 후보자까지 연행하는 만행이 연일 벌어지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내일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가를 생각하며 중심을 잡아야 한다”면서 제주해군기지 반대를 황당하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중심은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심이 과연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에서 중심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법이 원칙이고 중심입니다. 하지만 그 중심이 법과 원칙을 무시한 정치권력자의 의중에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잘못한 일은 반성하고 사과하면 됩니다. 그러나 법과 원칙을 만들어 놓고 대통령부터 지키지 않는다면, 국민 또한 그 법과 원칙을 무시하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허준영 경찰청장은 사임 후 코레일 사장을 거쳐,현재 새누리당 노원병 후보로 출마한 상황입니다.>

국민을 죽인 정권, 노동탄압 정권이라는 오명을 쓰면서도 그가 지켰던 것은 법과 원칙이었고, 그가 만들려고 했던 것이 경찰의 중립성이었습니다.그러나 오히려 경찰은 그가 만들어 준 임기제를 통해 권력자의 강력한 무기가 됐고, 승승장구 출세하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