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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이승만은 현충일을 왜 6월 6일로 정했나?



오늘은 제58회 현충일입니다. 호국선열을 추모하고 전몰장병을 위로하는 현충일은 6월 6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 현충일이 6월 6일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국가기념일이 역사적인 날짜에 맞춰 (일부 국가기념일은 역사상 오류를 범하고 있기도 한다) 선정되는 데 비해 현충일과 6월 6일이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지 기원조차 대부분 잘 모릅니다.

현충일은 1956년 4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 '현충 기념일'로 처음 지정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현충일을 6월 6일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국가기록원에서 밝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충일은 왜 6월 6일인가?>

1956년 4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고 공휴일로 정하였다. 현충일을 6월 6일로 제정한 이유로, ‘6월은 6·25 사변일이 들어있는 달이고, 24절기 중의 하나인 제사를 지내는 망종이 6월 무렵이며, 1956년의 망종이 6월 6일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1975년 1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개정되면서 ‘현충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82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정기념일에 포함되었다. (출처: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에 따르면(국가기록원도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단순히 설로 표현) 현충일이 6월 6일인 까닭은 6월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24절기 중의 하나인 망종을 따라 제사 형태를 취했다고 합니다.

<망종(芒種)이란? : 망종이란 까락 곡식(까끄라기가 있는 곡식 : 보리, 벼 등)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인 24절기의 하나로 태양 황경(黃經)이 75°에 달한 날, 즉 6월 5일, 6일 또는 7일이 된다. 옛적에는 이 시기가 보리 베기와 모내기에 적당한 시기이다. 따라서 조상들은 이 시기에 보리를 수확하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모내기를 한 벼들이 풍년이 들게 해주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가졌다.>

현충일에 대한 공식적인 제정 이유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면 굳이 현충일을 따로 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는 의문도 듭니다.

'순국선열기념일을 아십니까?'

아이엠피터가 현충일이 왜 6월 6일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이유는 현충일의 제정 이유 때문입니다. 현충일의 제정 이유를 보면 '국권회복을 위하여 헌신,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전몰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명목을 기원하기 위함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권회복, 즉 일제 강점기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위한 기념일은 이미 대한민국에 있었습니다.


1939년 임시정부 의정원은 11월 21일 임시의정원 정기회에서 지청천 등 의원 6명의 제안으로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지정하고, 다음 해부터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여 광복 이전까지 기념행사를 주관, 시행했습니다.

임시정부가 11월 17일 '순국선열 기념일'로 정한 이유는 11월 17일이 을사늑약(을사조약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기에 을사늑약이 적합하다)이 있던 날이고, 이날을 전후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하거나 국권 회복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내던졌고, 우리의 슬픈 역사와 순국선열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결정했습니다.

1945년 이후 49년까지 김구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던 순국선열추모행사는 한국전쟁 이후 정부에서 주관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정부행사가 폐지됐습니다. 그러나 광복회 등 유족 단체 등이 그 명맥을 유지했고, 1997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됐습니다.

'현충일은 6월 25일로, 순국선열기념일은 더 큰 행사로'

'아이엠피터'는 6월 6일 현충일도 순국선열을 기리고 11월 17일도 순국선열을 기리는 복잡함이 있다면 아예 현충일을 6월 25일로 바꿔 한국전쟁의 아픔과 당시 희생된 전몰장병을 위로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재 유명무실한 '순국선열기념일'을 부각하여 정말 일제 강점기 희생당한 우리의 진정한 애국지사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는 일도 큰 의미이자, 앞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기념일을 정하느냐는 기념일에 담긴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2010년 정부는 곽재우 장군이 경남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제정했습니다.  의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겠다는 '의병의 날'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이런 기념일도 다 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충일은 국가에서 정한 근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그저 6월이 한국전쟁이 일어난 달이고, 그해 망종이기 때문이라는 설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현충일 태극기 조기게양법.현충일은 순국선열에 대해 조의를 표하는 날이기 때문에 태극기를 다는 방법이 경축일과는 다르다. 깃봉과 깃면의 사이를 깃면의 너비세로)만큼 내려 조기로 게양한다.


지금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지만 (네이버 지식인에 가보면 현충일은 왜 6월 6일인가요?라는 질문이나 현충일 기원을 묻는 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수십 년이 지나면 도대체 왜 6월 6일이 현충일로 정했는지조차 아예 모를 수 있습니다.


'아이엠피터'는 현충일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면 국가가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여 널리 알릴 수 있는 의미 있는 날로 바꾸는 부분도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 이승만은 왜 제1회 현충일에 참석하지 않았는가?' 

1956년 6월 6일 제1회 현충 기념일이 열렸습니다. 당시 현충일 행사는 '제1회 전몰장병추도식'으로 거행됐으며,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함태영 부통령과 대법원장, 정부 각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조포와 국민의례 행사 뒤에 당연히 있어야 할 대통령 추도사가 갑자기 생략되고,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해서 국방장관이 헌화하고 함태영 부통령의 기도 후에 행사는 끝났습니다.

▲현충일 행사에 참석한 유족을 위로하는 함태영 부통령. 출처:동아일보


제1회 현충일이자,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열린 전몰장병추도식에 왜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1956년 5월에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8년 제정된 헌법과 1952년 헌법 제55조에 따르면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원칙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954년 '사사오입'이라는 전대미문의 개헌을 통해 이승만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위협하던 신익희가 서거하자 이승만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당시 자유당 이승만은 대통령 선거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죽은 신익희를 추모하기 위해 그를 기표했던 투표수가 무려 185만표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이 서울에서 득표한 표가 20만5천여표인데 무효표가 28만4천표라는 사실은 만약, 신익희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수 있었으리라는 예상도 가능했었습니다. 

서울 유권자의 76.9%가 자유당 이기붕이 아닌 민주당 장면을 선택했던 사실을 보면서, 이승만과 자유당 이기붕은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국민이 괘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충일 기념식 행사장에 놓인 구조물. 출처:동아일보


살아있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은 자를 기리는 국민이 이 정도였다는 생각인지, 아니면 저들의 죽음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책임이 있는지 알고 있는지, 그도 저도 아니면 행사조차 참석하기 어려운 노환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망종이기 때문에 제정한 국가적인 제삿날에 '국부'라 칭송을 받는 인물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승만과 우리의 현대사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전쟁 전에 이승만은 어설픈 국방력을 가지고도 '북진통일'을 외쳤댔고, 그 결과 북한의 남침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국민은 사지에 몰아넣고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친 인물입니다.

<이승만은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만인 6월 27일 서울을 떠났고, 대전에서 전화로 국군이 북진 중이라며 서울 시민을 안심시키는 방송을 녹음하여 방송했다.>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름 모를 전장에서 죽은 수많은 호국 영령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 이면에 국가 권력자들이 제대로 국가를 경영했다면 조금은 그 희생이 줄어들 수 있었지 않느냐는 반문도 해봅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분들에게 고개 숙여 명복을 빌며,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