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18민주화운동' 24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광주 국립5.18묘지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군악대와 합창단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노무현 대통령을 바라보는 보수 우익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참석한 일부 관료들은 못마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 자체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금지곡을 떠나 노래를 불렀다는 자체만으로 체포될 수 있었던 곡이었기 때문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처음 만들어진 1982년 이후 대학가와 노동,농민 운동, 6.10항쟁 등 대한민국 민주주의 운동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불리던 노래였습니다. 어쩌면 이 노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대변하는 곡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행사장에서 공식 추모곡으로 불린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끝나고 들어선 이명박 정권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본 행사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으며, 2010년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식에서는 방아타령을 연주하기로 했다가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할 공식 추모곡 제작에 나선다고 합니다. 이는 앞으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퇴출하겠다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안다면 절대 그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담긴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과연 이 노래가 퇴출당해야 마땅한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부끄러워 만든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소설가 황석영이 개사했고, 소니비엠지뮤직의 김종률씨가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은 한 마디로 '부끄럽고 죄송해서'였습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들이 망월동 묘역에 안치되는 장면, 박기순(좌)윤상원(우)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결혼식을 하듯 축의금까지 받는 영혼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신랑은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작전으로 도청에서 사망한 윤상원이고, 신부는 학생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하며 노동운동가로 활약하며 1978년 광천동 들불야학을 주도했던 박기순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이 열렸던 1982년 광주는 수백 명의 5월 항쟁 관련자들이 여전히 감옥에 수감되고 입 밖으로 항쟁을 얘기도 할 수 없었던 시기였습니다.
1982년 3월 운암동 황석영씨 집에 황석영,김종률,전용호씨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5월 항쟁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영혼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마음을 두 사람의 영혼을 기리는 창작노래극으로나마 달래자는 황석영씨의 제안에 따라 전체 구상과 노랫말은 황석영씨가 작곡은 대학가요제 수상 경력을 가진 김종률씨가,전영호씨는 노래부를 사람을 물색하고 연락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황석영씨는 당시 출판됐던 백기완씨의 시집에서 시를 골라 노랫말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창작노래극 넋풀이> 9. 임을 위한 행진곡 (대사 - 윤상원· 박기순 함께)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합쳐지듯이 남녘땅 북녘땅이 합쳐지소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묏 비나리> 시:백기완 (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중략)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노래 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고 그걸로도 안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걸로도 안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쑤셔넣고 아......... (중략) |
노래극으로 만들었지만, 공연은 운암동 황석영씨 자택 2층이었고, 장비는 기타와 장구,북,꽹과리,징, 빌려온 녹음기가 전부였습니다. 소수의 사람만 황석영씨 집에 와서 담요로 거실 유치창을 모두 막고 공연 관람과 녹음을 했고, 그렇게 공연겸 녹음이 함께 이루어진 '넋풀이' 창작노래극 테이프가 완성됐습니다.
이후 윤상원,박기순 두 사람을 위한 넋풀이에 들어있던 '임을 위한 행진곡' 테이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몰래 전해졌고, 이들은 숨죽이며 그 노래를 불렀고,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애창곡이 됐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떤 투쟁을 위해 시작된 노래가 아닙니다. 가사처럼 동지는 간데없고 산 자가 그것을 추모하며 그 뜻을 이어가겠다는 의도였기에,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에게는 '오월의 노래'로 이보다 적합한 것이 없어 매년 5월이 되면 그들을 기억하며 울면서 불렀습니다.
부끄럽고 그들을 기억하고자 만든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 불꽃처럼 대한민국을 지켰던 사람들'
윤상원,박기순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요? 빨갱이,5.18광주 사태를 저지른 북한 간첩?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결코 그들은 빨갱이나 간첩이 아닙니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박기순은 명문고로 불렸던 전남여고를 졸업 전남대학교 국사학과에 다니다가 1978년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이 '민주교육지표선언'을 하다가 체포되자, 이들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다 무기정학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광천동 '동신강건사'에 취직하여 공장에 다니면서 들불야학을 주도했습니다.
▲윤상원,박기순이 합장된 묘지.
1978년 12월 26일 야학 학생들과 교실의 난방용 땔감을 구하러 야산을 헤매다 밤 11시에 오빠 집으로 와서 잤던 박기순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습니다.
광주 출신 윤상원은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주택은행에 근무했습니다. 그는 입사한지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며 노동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때 박기순이 들불야학을 맡아달라 했고, 수차례 거절에도 박기순이 끈질긴 설득을 하자, 결국 들불야학의 교사로 참여하였습니다.
▲1980년 들불야학 졸업식
들불야학은 광주 광천동의 빈곤 지역에서 시작됐는데, 박기순과 윤상원은 들불야학을 통해 '사랑이 밑받침된 진정한 인간 교육의 실현'을 추구했습니다.
당시 교육방법은 주입식 교육이 아닌 강학과 학생의 대화를 통한 문제 제기형 교육이었습니다. 교육 과정은 중학과정에 중심을 두었으며, 이들의 수업 방법과 운영 방식은 민주주의적이면서 굉장히 선진화된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야학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왜 지식인들이 야학을 주도했느냐면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부흥하고 일본에서 독립되려면 문맹을 타파하고 그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고, 이를 위해서 야학운동이 점차 늘어난 것입니다.
▲마산노동야학을 주도했던 명도석의 생가터,마산노동야학의 자금처였던 옥기환(우)과 그의 사업체였던 원동무역주식회사(좌)
대한민국 야학의 시작은 1906년 함흥의 농촌계몽운동 일환으로 설립된 농민야학 '보성야학'과 1907년 경남 마산에서 설립된 '마산노동야학'이 있습니다. '마산노동야학'은 마산 유지였던 옥기환,구성전이 돈을 내고 명도석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한 야학입니다.
마산노동야학의 학생은 노동자,농민,빈민의 자제로 가장 중요한 수업이 바로 조선어였습니다. 또한, 수업료도 받지 않고 이들을 가르쳤고, 이후 마산 경남 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의 배경이 됐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의 주인공이었던 윤상원,박기순이 무엇을 하려고 했던 인물입니까?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인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과거 올바른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을 아낌없이 내놓고 우리 민족을 살리고자 애썼고,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1978년 12월 27일 박기순이 죽자 윤상원은 일기장에 ‘영원한 노동자의 벗 기순이가 죽던 날’이라고 기록하며 슬퍼했습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야
왜 말없이 눈을 감았는가?…훨
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난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노래를 돌려달라'
임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 행사에 불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기득권 세력으로 독재 권력과 영합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일신의 영달을 꾀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독재권력을 비판하며 불렸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목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약간은 창피하기도 할 것입니다. 많은 국민이 피 흘리는 자리마다 그들은 없었고 민족을 위해 애썼던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던 김종률씨는 "저는 총을 들고 나서서 싸우는 용감한 투사가 되지 못했어요. 여느 사람들처럼 데모하고 저녁에는 무서워 숨어다니는 대학생일 뿐이었죠. 하지만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본 저로서는 아픔이 무척 컸습니다'면서1980년 5월을 기억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야학을 주도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교사와 학생들은 안 무서웠겠습니까? 일제에 체포 투옥되던 그들도 인간이기에 무서웠고 두려웠습니다. 전두환이 정권을 무력으로 쟁취하고 국민을 억압하던 시점, 민주주의를 외쳤던 자들도 모두 무섭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무엇이든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작은 노력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5.18묘역에서 파안대소를 하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추모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바로 당시에 희생된 사람들과 그 유족, 그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가장 잘 기억할 수 있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대로 곡을 바꾸려고 합니다.
아직도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의 보수는 5.18민주화운동을 반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신들의 정권이 민주주의에 위배된다면 어느때라도 국민이 일어서 반대할 수 있다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4.19혁명'
'부마항쟁'
'5월항쟁'
'6월항쟁'
이 모든 사건은 국민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3.15부정선거'
'5.16군사 쿠데타'
'12.12사태'
이 모든 사건은 개인이 나라를 독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대통령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국민이 피 흘리며, 아파하며,두려워하며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이 앞선 자를 따를 수 있는 기억만큼은 돌려줘야 합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압니다. 부끄러운 역사를 우리가 기억할 때만이 대한민국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무고한 국민을 죽였던 역사를 숨기기 위해 노래까지 바꾸려는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합니까? 비록 두렵고 힘들어도 언젠가는 새날이 오리라 믿고 살아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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