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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김무성 "노무현 6월항쟁 참여안해" 발언을 반박해주마



요새 새누리당 의원들이 망언을 일삼더니 이제 역사를 왜곡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고 자행하고 있습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은 24일 부산 김해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새누리당 안에 나 같은 민주화 세력이 있다. 우리는 6월항쟁을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은 6월 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여러분은 잘못 알고 있어요. 뒤져보라고,,"라면서 "6월항쟁은 민추협이 주도가 돼 전국을 다니면서 직선제를 요구한 것이고, 서울 일원에서만 있었던 저항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게 민추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6월항쟁을 아이엠피터는 나름으로 열심히 자료를 찾아 놓고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이 나오자,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 너무나 어이없음을 느꼈습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이 찾아보라고 했으니 찾아봤습니다. 

' 민추협이 주도 했다고? 노무현도 민추협인데'

김무성 전 의원이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이 6월 항쟁을 주도했고,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부터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민추협 활동가들의 명단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가 펴낸'6월항쟁을 기록하다'2권에 나온 민추협 명단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에서는 6월항쟁의 기록을 정리한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민추협의 탄생 배경과 활동내용, 그리고 소속 인사들의 명단을 수록했는데, '6월항쟁을 기록하다' 2권 389페이지를 보면 분명히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민추협 집행부와 일반회직자 명단을 열거한 이 책에 따르면 김무성도 일반회직자의 가나다순으로 표기된 명단에 나옵니다. 


자신이 민추협에 속했고 이 민추협이 주도적으로 6월항쟁을 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없었다고 하는데, 분명히 민추협 명단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것부터가 벌써 그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망언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 뒤져봐서 찾았는데 이제 어떠하시겠습니까? 

'6월민주항쟁의 조직: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6월항쟁을 조직적으로 움직였던 중심에 민추협이 있었다는 사실은 맞습니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을 전국적으로 이끌었던 체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87년 1월 14일,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하면서 6월민주항쟁의 불꽃은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경찰의 원천봉쇄로 저지되자,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거리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박종철 고문 사망으로 거리에 나온 민가협과 학생들.


고문사건으로 국민들은 진실을 규명하고 고문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고 외치는 사이, 전두환은 4월13일 개헌은 없다는 '4.13호헌조치'특별담화를 통해 현행 헌법(체육관 선거)으로 대통령 선거를 연내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전두환의 '4.13호헌 조치'가 발표되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신부들은 일제히 4.13호헌 조치를 비판했고, 서울,광주 신부들은 단식기도에 돌입합니다.5월23일 재야인사 등 134명은 기독교회관에서 박종철 고문살인은혜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6월10일 규탄대회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1987년 5월27일 민주당,종교계,재야단체 등 발기인 2,191명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발대식을 거행하고, 4.13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합니다.

▲ 6월10일 전국에서 열린 시위 장면, 출처:6월민주항쟁운동계승사업회


1987년 6월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주최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0개 도시에서 가두 시위 형태로 일제히 열렸습니다. 이날 시위로 3,851명이 연행됐고, 6월10일 시위대 중 350여 명이 명동성당에서 계속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6월민주항쟁을 다른 말로 6.10항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6월10일 시위를 전국적으로 주도했고, 6월10일 시위에 참가했던 시위대의 명동 성당 농성을 일명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일반시민까지 지지를 벌이면서 6.29선언까지 일끌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주최로 열린 6.10항쟁의 사진을 보면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얼굴이 정확히 있습니다. 그런데 2번 사진을 보시면 앞서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가 펴낸 사진첩에 있는 부산시위 사진과 비슷합니다. 아마 노무현 변호사가 찍힌 사진은 경찰의 진압 전이고, 사진첩의 사진은 경찰의 진압이 시작된 직후의 사진으로 보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이었습니다. 그를 가리켜 '부산 6월 민주항쟁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는 6월 항쟁의 배경부터 6월10일 시위, 그 이후의 투쟁까지 모두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6월항쟁을 기록하다' 부산지역 편을 보면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무려 8번이나 나옵니다.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지역 시위와 행사 때마다 등장했으며, 검찰이 그를 어떻게하든 잡아 넣으려는 탄압 이야기도 나옵니다. 노무현 변호사는 6월항쟁 이전부터 부산 지역의 재야인사로 6월민주항쟁의 주도세력이었고,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바친 민주화 투사였습니다.


이런 그를 두고 6월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6월항쟁에 참여한 사람으로 할까요?

'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진정한 투사'

민추협을 6월항쟁을 주도한 세력으로 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이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저는 그리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민추협이 김영상의 단식으로 시작된 정치 세력의 조직화였기 때문입니다. 

아이엠피터는 6월민주항쟁을 6.29선언까지 이끌었던 배경에는 민추협과 같은 정치조직의 움직임보다, 시민사회의 중간계급층이 4.13호헌조치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는 점을 증거로 내세우고 싶습니다.


4.13호헌 조치가 나오자, 김수한 추기경은 “개헌의 꿈이 깨져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는 부활절 메시지로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이끌어냈고, 한국기독교협의회,대한변호사협회등도 즉각 반박 성명을 냈습니다. 여기에 사회운동세력(민통련,민주언론운동협의회,여성단체연합,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과 연극인,해직교사,영화인,미술인,교수 등 각계 각층의 세력들이 일제히 나섰습니다.


▲6월항쟁에 참여한 택시기사들과 넥타이부대로 불리는 일반 회사원들

이런 사회 각계각층의 움직임과 더불어 주목할 것은 정치세력과 동떨어진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즉각적이면서 대규모로 이루어진 점이 6월항쟁의 성공 요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원은 4.19 이후 최초로 대중의 정치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으며, 부산 사직야구장에서는 프로야구 롯데와 해태 경기 종료 이후 많은 관중들이 '우리의 소원','애국가'등을 부르면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자발적인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아이엠피터가 민추협이 6월항쟁의 조직은 될 수 있지만, 성공 요인이라고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비정치적 세력인 시민세력들이 6월항쟁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3당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 모습과, 3당 합당을 반대했던 노무현 대통령


87년 민주항쟁은 성공이기도 했지만, 패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힘들게 얻은 민주화에 대한 불꽃이 3당 합당으로 다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김영삼의 단식으로 민추협이 민주화 운동의 배경이 됐지만, 결국 정치세력들은 자신들만의 정권을 만들기 위해 야합을 해버렸습니다.

민주자유당이라는 거대 여당의 탄생으로 5공 청산은 물러갔고, 부동산가격 폭등,물가고,토지 공개념,금융실명제 등의 민주주의에 꼭 필요한 일들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3당 합당의 주역은 김영삼이었고, 김무성은 민주자유당 의사국장과 의원국장을 했습니다.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군과 사망당시 동아일보 기사,선배 박종운의 프로필


6월항쟁의 기폭제였던 박종철군은 사실 운동권 핵심 인물이 아니라, 아예 수사관들도 신경 쓰지 않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고문까지 당하며 죽었을까요? 그것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의 주역이었던 박종철의 선배 박종운 때문이었습니다.

박종철은 하숙방으로 찾아온 선배 박종운에게 "형 너무 추워 보여요"라며 누나가 짜준 목도리와 지갑 속에 있던 돈 전부를 털어줬고, 박종운의 행방을 쫓던 수사관들에게 연행됐습니다. 이후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말하라는 고문을 받던 중 그는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선배를 위해 목숨을 잃었건만, 정작 당사자였던 선배 박종운은 한나라당에 입당해 경기도당 서부지역 총괄본부장까지 지냈습니다.


'3당 합당'으로 1987년 6월항쟁을 수포로 돌린 장본인이 김영삼과 김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며 바보같은 정치를 했던 노무현을 6월 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어머니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의 거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나간다

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향해 나간다
어머니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사람 사는 세상'은 민중가요' 어머니'의 가사에서부터 시작됐다)


“87년 6·10항쟁은 국민이 승리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국민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를 아직 벗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자명합니다. 나머지 절반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2007년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식 -노무현 대통령)

역사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 노무현 대통령을 6월 항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들만의 부귀영달을 꾀하는 자들은 엄연한 역사까지도 바꾸려고 합니다.

역사는 분명히 말해줍니다.
누가 진정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자신을 희생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