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2012. 9. 14. 07:30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인혁당','5.16 군사 쿠데타' 등에 관한 발언으로 언론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근혜 후보는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에 출연해 박 후보는 "(유신과 5ㆍ16의 경우)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만약에 내가 지도자였다면, 이런 입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생각하며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며 "그런 부분은 객관적으로 역사가 판단해 나아가지 않겠나. 그것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 후보는 특히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셨다"며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은 박근혜 후보의 말과 너무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박정희가 과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떳떳했던 인물인지, 그가 죽었던 1979년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우리 각자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1979년, 그 암울했던 경제 상황'

박정희를 일컬어 산업화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칭찬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럴 순 있습니다. (그 당시 독재자들이 어느 정도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키웠던 시대 상황으로만 본다면) 그러나 그가 죽었던 1979년을 보면 산업화의 장본인, 경제 성장의 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 1979년 6월4일자 동아일보 기사

 
1979년은 서민을 비롯한 자영업자, 중소기업 모두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6월인데도 벌써 '물가 연말억제선'이 무너졌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1979년 5월 도매 물가는 10.5%,소비자 물가는 12.3%의 상승률을 기록해 정부가 정해놓은 물가억제선 도매 10%, 소비자 12%를 모두 넘었습니다.

1978년은 식료품가격이 올라 물가인상으로 서민이 고통받았다면, 1979년은 수입원자재와 공산품까지도 가격이 올라, 소상공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979년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나빠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2차 오일쇼크가 왔던 요인도 있지만,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까지 올라가 버렸습니다. 가장 문제가 됐던 점은 바로 부동산 투기로 인한 빈부격차가 최고조로 달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는 1979년 토지가격을 무려 49%나 급등하게 했고, 이 때문에 집 없는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박정희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의 인력을 대거 도시로 끌고 와 나라 경제를 살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그의 정권 통치기간 내내 소모품으로 살면서 일의 대가조차 받지 못하고, 도시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박정희의 산업화가 왜 문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재벌만을 위했던 그의 경제 정책입니다.


1979년 대한민국 제조업 출하액을 보면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 10대 재벌의 경우 22.7%,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였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정경유착을 통해 정치자금을 받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1961년부터 잘살아보세를 외쳤지만 18년 동안 재벌만 잘살았던 것입니다.)

재벌은 특혜 금융을 통해 자신들의 재산은 늘렸지만,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아 사회 빈부의 격차를 늘려놓았습니다. 아직도 박정희의 산업화 때문에 잘살게 됐다고 믿는 사람을 보면 '당신이 아닌, 재벌이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당시 경제는 재벌을 위한,재벌만의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1978년에 발생한 삼성조선의 '산업스파이'사건, 삼성조선은 대한조선공사의 설계도와 기밀 서류를 빼돌리다 적발됐다.출처:1978년 4월17일자 동아일보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당시 재벌들이 정부 보증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상위 5대 재벌이 되느냐 10대 재벌이 되느냐가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재벌들이 자기 자본 없이 무조건 정부의 금융특혜로 기업을 키웠는데, 당시 중화학산업의 평균자기자본비율은 22%에 불과했고, 1979년 5월은 총투자규모의 30%가 투자 보류 내지는 중지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재벌이 정당하게 기업 활동을 했다면 박정희의 산업화가 인정을 받았겠지만, 정치자금을 내고 금융 특혜를 받으며, 기술력보다는 비리를 통해 재산을 늘리면서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 재벌의 모습은 독재국가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에 불과했습니다.

▲ 1965년부터 1983년까지의 물가지수. 출처:통계청

1970년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물가는 점점 가면 갈수록 서민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경제 성장률은 1976년 14.1%,1977년 12.2%였다가 1978년 9.7%로 계속 내려갔습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1979년 경제성장률은 6.5%였고, 국가채무는 200억 달러를 넘어 국가부도 사태까지 제기될 정도였습니다.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어도, 그는 결국 국가 경제의 부도로 하야했을 정도로 당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 1979년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박정희의 죽음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1979년 '부마항쟁'입니다. 이 부마항쟁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재 여부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통치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의 구호와 신민당사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는 여공들.경찰의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부마항쟁을 김영삼 제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YH무역 여공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YH무역이 공장문을 닫아 기숙사에서 잠자던 여공들이 쫓겨 나와 간 곳이 신민당사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정치를 통해 유신독재의 경제정책 결과인 배고픔을 탈출하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자가 야당과 연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민당사를 공격했고, 경찰진압과정에서 숨진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을 절대 언론에 보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산업화를 칭송하는 이들은 당시 배부른 돼지는 서민이 아닌 재벌뿐이었고, 대한민국 노동자와 서민은 굶주림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예였다는 사실을 절대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필자가 앞서 1979년 경제 상황을 말한 이유는 박정희가 만든 경제허상의 실체를 국민이 인식하고 반발하는 시점이 1979년이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공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지불...극심한 소득분배의 불 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10월16일 부산대 선언문 중에서


김영상의 제명 이후 불거진 부마항쟁은 유신이라는 정치적 독재 상황도 중요했지만, 당시 대다수 국민의 삶이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점도 원인으로 봐야 합니다.


▲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김탁돈

재벌과 박정희 산업화의 노예로 전락했던 국민이 경제허상을 자각하고 일어서는 시점에서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단순히 위수령과 비상계엄령 등의 무력통치로 진압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것이 그동안 일어났던 학생운동과 본질에서 차원이 다른 사태라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 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 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김재규의 증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학생데모가 아닌 민란으로 규정했을 정도입니다. 만약 10.26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물가고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발생한 부마항쟁의 끝은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다시 전국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고, 이는 4.19처럼 박정희가 하야하는 사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굶주리고 억압받는 국민이 자유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데 총을 쏘겠다는 자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재라고 해야 하는가?


김재규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며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아마 광화문 네거리는 피바다가 됐을 것이고, 무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차지철을 통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최악의 학살을 자행했을 것입니다.

1979년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어설 수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재벌과의 정경유착으로 정치자금 모으기, 언론통제를 통한 우민화 정책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유신체제를 위한 사법 살인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권을 국민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고, 이는 그가 죽음으로 끝이 났었을 뿐입니다. 

' 박정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가 유신을 종식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그를 판단한다면, 박정희는 결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권이양을 하겠다던 박정희의 기자회견,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해부터 국민에게 거짓말을 누차 반복했던 독재자였습니다. 군사혁명정부는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떠나겠다고 했지만, 그의 말은 채 1년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됐습니다.

○ 혁명정부가 사용했던 복지국가

지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내거는 공약 중에 복지국가, 경제 민주화가 있습니다. 그 말의 어원은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혁명정부 기자 회견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복지국가라는 말을 항상 사용했는데, 그가 복지를 "국민의 기본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경제생활에 국민이 그들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유신체제에서 국민의 기본인권이 지켜진 적이 있습니까? 인혁당 사건만 봐도 명백한 사법살인이었습니다. 고문과 투옥, 언론통제가 이루어진 나라, 재벌에게 특혜를 주고 노동자들은 분신자살과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복지를 내세우며 혁명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복지국가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만든 나라는 억압과 독재, 인권 유린의 땅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사건 8명은 판결이 내려지고 불과 18시간 후에 사형이 집행됐으며,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인간의 자유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후보 라디오 연설에서 "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 인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1971년 대통령 담화에서는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떠드는 사람이 추앙하는 박정희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가 언제라도 박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러했습니다. 인혁당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박정희는 형법에 국가원수 모독죄를 제정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 이번이 마지막?

박정희는 군사쿠데타가 끝나자마자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당당히 국민앞에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뻔뻔하게 대통령 선거에 계속 출마했습니다.1971년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 관련 기사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후보 유세연설에서 "이번에 또다시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 총통제를 만들어 박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하련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여러분에게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둔다."라며 '이번이 마지막 대통령 출마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해 6년 연임제를 통과시키고,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5선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이라고 외쳤던 것은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마지막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출처:동아일보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내 재산이 문서로 발견되면, 그 돈을 도시의 판잣집을 기와집으로 고치거나 농민들의 영농자금에 쓰도록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10.27일 전두환은 합수부를 통해 박근혜와 함께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금고2'를 열었고, 여기에서 자기앞 수표 1천만원짜리 수십장, 5백만원짜리 수십장등 9억5천여만 원과 박근혜,박지만,박근영의 적금 통장을 별견했습니다. 

전두환은 현금 6억 원은 박근혜에게 줬고, 비자금 장부와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집무실에 있던 '금고1'은 박근혜가 챙겼다고 하는데, 과연 그 돈이 얼마인지 아직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사망당시 궁정동 안가의 모습과 MBC드라마에 나온 장면.

필자가 지금 이 나이에 박정희의 죽음을 맞이했다면 9살 어린 나이 때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비밀 안가에서 젊은 여자를 안고 술마시다 죽은 독재자의 죽음을 슬퍼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공과를 말하면서 그를 칭송하며 역사의 판단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점을 그의 공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재벌과 독재자를 위해 밤을 새우며 미싱을 돌린 대가가 '배고픔', '인권유린','자유의 억압과 탄압'이었는데 무엇을 칭송해야 합니까?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1991년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분석한 책 '네 마리의 용'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원인으로 북한의 위협으로 만든 사회적통합과 훈육된 인력, 국가에 대한 인식,엄청난 교육열을 손꼽았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18년간의 독재자였다는 말뿐이었습니다.

▲ 박정희와 전태일 열사 묘비,출처:인터넷


1979년 박정희가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줄 가능성이나 독재를 끝내겠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일본군인의 단기(短氣:‘한다고 했으면 하는 성격)를 품에 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1979년 국민 대다수가 참고 참다가 마지막으로 일어설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을 어떻게 진압했을지는 뻔합니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다 죽은 두 사람을 보면서 누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Posted by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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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의

    70~75% 의 공은 덮고 20~25% 의 과만 크게 부풀려 헐뜻어 비방 하는데에만 몰두하는 집단은 북한에겐 왜 그렇게 우호적인지 묻지 않을수 없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한복 뒷단이 희여져 덧단으로 꿰메 입는 근검절약 의 정신 으로 할때 민주를 외치는 주동자들은 수입한 물건으로 치장하고 박정희 대통령 당시 서거때 허리띠<벨트>가 희여지고 양말이 구멍이 뚦려 발가락이 나온 근검절약 의 정신으로 하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거짓이라고 할겁니다 그렬때 민주와 데모 북한만을 찬양하는 집단 세럭들은 외제만 찿는 나쁜 세력들 증거로 서울대학 병원에서 1985년까지 간호부장 을 역임했던 분의 증언입니다 개인도 회사도 국가도 누가 돈을 빌려주며 꾸어줍니까 그때를 말하는겁니다 독일 간호사 탄광부 월남파병 하여 외자 유치할때 독재만 외치고반목하는 세력들이 이나라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묻지 않을수 없습니다 돈빌릴곳도 없는 가난의 나라 당시 부국인 일본한테 외자 차관 끌어들일때 그얼마나 독재 독재만 반대만 일삼던 집단은 지금의 발전이 되니까 마치 자기들이 모든걸 이룬냥 왜곡 날조하는 집단들 은 편 가르기와 국론분열 을조장 하는 나쁜 세력들 선거때만 되면 박근혜 개인의 흠은없고 박정희 대통령 공은 최소화 과는 최대화 하여 선동선전 국민을 현혹하는 집단은 표로써 심판 해줄겁니다

    2012.11.18 19:18 [ ADDR : EDIT/ DEL : REPLY ]
  3. 잘살고 이런 글도 쓸수 잇는게다..-감히 여자랑 술마시고 놀다가 살해당 햇는다는 이런 어이없는 모독을 하다니...국사를

    2012.11.27 15:33 [ ADDR : EDIT/ DEL : REPLY ]
  4. 그동안 일어났던 학생운동과 본질에서

    2012.11.28 18:52 [ ADDR : EDIT/ DEL : REPLY ]
  5. 이제 뭔가 알겠다

    2012.12.01 23:06 [ ADDR : EDIT/ DEL : REPLY ]
  6. 아!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2012.12.01 23:09 [ ADDR : EDIT/ DEL : REPLY ]
  7. 주인과 글쓴이만 볼 수 있는 글입니다.

    2012.12.03 00:47 [ ADDR : EDIT/ DEL : REPLY ]
  8. 루님, 안녕하세요. 위젯뱅크입니다. 블로그의 "꾸미기" 를 클릭하시면, 위젯 주위에 점선이 생기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때 위젯에 마우스 커서를 얹고 왼쪽 클릭한 상태에서 위젯을 옮기고 싶은 장소로 끌어가시면 위젯이 따라가며 위치가

    2012.12.03 00:48 [ ADDR : EDIT/ DEL : REPLY ]
  9. 불로그 들어가는 방법좀 알켜줘요

    2012.12.05 19:45 [ ADDR : EDIT/ DEL : REPLY ]
  10. 축하해요 행복하세요

    2012.12.05 19:59 [ ADDR : EDIT/ DEL : REPLY ]
  11. ㅈ ㅔ 블로그에도 갑지가 사라졌네요.. 조치 부탁드립니다.

    2012.12.05 20:02 [ ADDR : EDIT/ DEL : REPLY ]
  12. 반가워요...허브향기 그윽한 친구이고 싶죠

    2012.12.05 20:14 [ ADDR : EDIT/ DEL : REPLY ]
  13. 이렇게 로고까지 달면 왠지 나도 전문가인듯한 으쓱함.....ㅎㅎ
    감사합니당~~^^*

    2012.12.05 20:18 [ ADDR : EDIT/ DEL : REPLY ]
  14. 블로그에 올린 동영상 재생이 잘안되던데 한번 봐주셨음 합니다. 꾸벅

    2012.12.05 20:22 [ ADDR : EDIT/ DEL : REPLY ]
  15. 잘 알았습니다.수 있는 글입니다.

    2012.12.20 03:52 [ ADDR : EDIT/ DEL : REPLY ]
  16. 정의를 논하는 자님 댓글은 말쪽이나 잘하시라고요. 진실이라 믿는 것과 진실을 구분하려는 노력도 못해요? 그리고 `잃어버린 10년 `이란 말 빼앗겼

    2012.12.26 19:10 [ ADDR : EDIT/ DEL : REPLY ]
  17. 선동꾼OUT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잘못된 역사를 배우지. 박정희가 이룬 국가발전의 업적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은 채로 독재에 대한 내용만 풀이한다면 그 누가 박정희를 옳게 보겠는가? 박정희는 분명 독재를 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박정희의 이름 세 글자가 사람들의 기억에 박혀있는 것은 그의 지휘아래 기적처럼 발전된 조국의 모습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배고픔을 채우기 보다도, 미래의 자식들에게 부족함 없이 먹이자는 신념으로 일했던 노동자들을 모욕하지 마라. 그들은 분명 인권에 대해 무지했고, 배고픔에 시달렸으며, 제대로 된 자유도 누리지 못했겠지만 그 분들로 인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건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민들을 지휘했고, 국민은 그를 따랐을 뿐이다.

    2013.02.27 23:53 [ ADDR : EDIT/ DEL : REPLY ]
  18. 선동꾼OUT

    이런 사람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잘못된 역사를 배우지. 박정희가 이룬 국가발전의 업적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은 채로 독재에 대한 내용만 풀이한다면 그 누가 박정희를 옳게 보겠는가? 박정희는 분명 독재를 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박정희의 이름 세 글자가 사람들의 기억에 박혀있는 것은 그의 지휘아래 기적처럼 발전된 조국의 모습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배고픔을 채우기 보다도, 미래의 자식들에게 부족함 없이 먹이자는 신념으로 일했던 노동자들을 모욕하지 마라. 그들은 분명 인권에 대해 무지했고, 배고픔에 시달렸으며, 제대로 된 자유도 누리지 못했겠지만 그 분들로 인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건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민들을 지휘했고, 국민은 그를 따랐을 뿐이다.

    2013.02.27 23:53 [ ADDR : EDIT/ DEL : REPLY ]
  19. 박정희의 국제적유산

    박정희의 국제적 유산(2011년)
    저자:윌리엄 오버홀트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전문가. 하버드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예일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하버드대학교 교수이자 케네디정책연구원 수석연구원, 미국 랜드연구소 아시아태평양정책센터 소장을 맡고있다.

    빌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대선 슬로건으로 성공적인 캠페인을 가졌지만, 박정희는 이 전략으로 한 나라를 구했다.1961년, 박정희는 세계에서 가장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는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초토화 된지 몇 년 되지 않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정치적 안정성 역시 세계 최악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한국은 풍부한 천연자원, 우월한 산업능력, 정치적 안정성과 모택동의 지원을 등에 업은 북한과 대결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전임자들과 그의 적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 이승만의 절대적인 우선순위는 군사능력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지도자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전쟁이 끝나고도 나라의 모든 자원을 군사분야로 쏟아 부었으며, 이는 경제개발이 후 순위로 밀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은 군사능력에 치중하였으며, 북한은 아직도 국가자원의 대부분을 군에 쏟는다. 박정희 역시 군사적 능력을 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GDP대비 국방예산을 줄이고 경제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는 경제발전이 군사적 능력 배양을 위한 산업기반이 될 거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박정희의 이러한 결정은 2009년에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 격차가 35배에 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개개인의 풍족함 외에도 군사적 우위,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커져가는 국제적 위상을 가져왔다. 이는 북한의 낡아가는 군사, 정치적 사기저하, 국제적 악명과 대비되는 결과이다. 박정희는 만주국에서 복무한 경험으로 만주의 산업기반이 어떻게 일본의 군사능력을 키웠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앞선 장면 정부는 다른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군사력중시, 인권탄압과는 다르게 장면정부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요시하였으며, 이러한 면은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장면정부는 인플레이션, 둔화된 성장, 비효율적인 행정, 사상적 대립, 폭력적인 시위, 그리고 강력한 북한과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굶주리고 두려움에 떠는 한국국민들에게 이러한 혼란은 발전에 대한 희망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이 당시 한국은 북한에 대적하기 위해 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능력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로 인해 1961년 5월에 일어난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저항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경제 우선주의와 경제성장을 위한 정치적 안정은 박정희가 세계에 주는 가장 큰 교훈이다. 역사상 한 나라가 이토록 빠른 시간에 전략적 열위상태에서 전략적 우위를 이뤄낸 것은 찾아보기 대단히 힘든 일이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한 민족이 문맹과 영양실조, 가난의 상태에서 이 정도 번영과 수준 높은 교육을 이뤄낸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일본의 성공은 박정희의 한국에게 영감을 제공하였고, 기술력, 경영 노하우, 그리고 경제적 자극으로 도왔다. 하지만 한국이 성취한 것은 일본과는 다르다. 한국이 국방에서 경제로 우선순위를 바꾼 것은 자체적인 결정이었지만, 일본의 비무장은 강요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 기적이 회복이었다면, 한국의 기적은 최초로 창조된 것이었다. 일본의 성공은 침체와 쇠락으로 이어졌지만, 한국은 보다 세계화되고 경쟁력 있는 경제체제에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 일본이 빠른 시간에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 높은 국제적 위상을 달성한 것은 근본적인 지정학적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국가들은 이웃을 침략하고 부를 약탈하며, 자신의 농민들을 징수하며 번영을 이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서는 구미국가들의 경제보다 3-5배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경제적 성장만으로도 같은 반열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고 모방하려 하였다. 이와 동시에 현대군사기술의 발달은 전통적인 군사적 승리를 득보다 손해가 큰 피로스의 승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를 포착한 동아시아국가들은 변화를 미약하게 이해한 미국보다 비교적으로 많은 이득을 보았다

    남한과 대만은 이러한 지정학적 전략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과 인도네시아는 이를 모방하여 이득을 보았다. 중국은 20년정도 뒤쳐졌지만 이웃국가들의 발전을 본 등소평의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이들을 따라 하였다. 주룡지와 대화했을 시 그가 한국의 경제적 교훈들을 서양학자들보다 깊이 있게 살펴본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제성장을 우선순위로 두는 기본적인 것 외에도 다른 중요한 교훈들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테이블에서 왜 등소평은 성공했고, 서양에서는 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고르바체브는 실패했는지 볼 수 있다.

    동아시아적 가치
    고르바초프의 가치
    1. 농업
    1. 국제정치
    2. 경공업
    2. 국내정치
    3. 중공업
    3. 중공업
    4. 국내정치
    4. 경공업
    5. 국제정치
    5. 농업
    한국/동아시아적 접근은 인구의 대다수에 직업과 소득, 교육을 제공하는 것에 집중한다. 이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고, 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다. 잘 교육받은 중산층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복잡한 현대정치가 안정적이고 효율적이고 작동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다. 강한 경제와 안정적인 정치체제는 지정학적 위상의 기반이 된다.

    토지개혁을 통한 농업 분배(박정희 대통령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와 새마을 운동,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준 경공업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나아가서 박정희는 교육분야에 있어서 확고한 평등주의자였다. 박정희는 엘리트계층이 출현하는 길인 명문 학교들을 닫아버리는걸 선택하였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평등주의는 사회주의 사상과 연관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에 반하고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박정희의 평등주의는 잘 교육된 노동 인구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넓은 시장을 가능하게 했으며, 예를 들어 인구의 상당부분이 같은 시간에 라디오를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됨으로써, 최대규모를 가진 국내시장을 만들어 내었다. 나아가서 이는 민주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는데, 교육된 국민은 국가 정책을 이해할 수 있으며, 평등한 중산층은 국민이 공유하고 공감하는 이익에 투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접근의 성공은 보다 우파적인 사회인 태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태국의 엘리트주의적 교육과 소득격차는 교육받는 노동인구의 수를 축소시켰으며, 이는 내수시장을 위축시키고 기술개발을 어렵게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태국은 분열되어 있으며, 낮은 교육수준으로 인해 민중 선동에 취약하다. 태국은 경제발전이 지지부진하고, 다른 형태의 엘리트주의를 갖고 있는 필리핀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의 본보기를 따라 농업개혁과 전국민의 문해능력을 추진하였다. 개혁주의 중국은 소득격차 개선과 사회적 정의 면에서는 한국과 대만에 미치지 못하지만, 태국과 필리핀의 엘리트주의보다는 한국 모델에 더 근접해 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현재의 경제적 이론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국내기업을 성장시키고, 한 분야에서 성공한 기업들이 다른 분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신생산업들을 보호하고, 점진적으로 경제를 자유화시켰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선진국의 기업들이 최대한의 속도로 개도국의 시장을 점유하는 것에는 유리하지만, 한국, 싱가포르, 대만, 중국의 정부주도 관치주의적 접근은 경제적 성공의 특징이다.

    박정희의 정부주도 경제개발은 다른 정부주도모델의 실패를 경쟁을 통한 효율성으로 피하였다. 그는 같은 산업분야에서 열 몇 개의 재벌들이 경쟁하도록 하였다. 만약 재벌들이 노력하였지만 정부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재벌을 지원했지만, 형편없는 경영을 하여 실패하였다면 그 재벌은 버려졌다. 치열한 국내경쟁과 점진적은 시장개방은 한국의 경쟁력을 개선시켰으며, 독점이 횡행하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경쟁이 전무했던 소련의 전철을 밟는 것을 방지하였다. 중국은 한국 모델을 모방하였으며, 국내경쟁에 중점을 두고 1990년대 말부터 한국보다 더 개방적인 정책을 택하였다.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한국의 경제성장 경험을 자세히 연구하고서 만들어졌다.

    박정희의 경쟁에 대한 강조는 성공을 장려하는 정책을 통해 강화되었다. 재벌과 새마을 운동 정책에서 박정희는 실패를 구제하지 않았으며, 가장 성공적인 회사와 마을들에 자원을 더 제공하였다. 박정희는 모두에게 성공할 기회를 주는 것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고, 보편적인 교육을 강조하였지만, 이와 동시에 실패를 구제하기보다는 성공을 장려하였다.

    박정희는 근대경제를 건설하려는 의욕을 갖고 있었지만,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정책은 자유무역지역을 설정하고, 수자원, 전력, 그리고 정부지원을 집중하였다. 이러한 구역들은 산업발전을 촉진해서 전국을 개발할 수 있는 자원들을 생산해냈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이 정책인 중국의 경제특구의 모델이 되었다. “하나의 국가, 도시, 섹터, 회사 두 개의 시스템” 방식의 접근을 통해 한국은 전근대적 시스템에서 근대 시장경제를 건설할 수 있으며, 중국은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정희의 경제위주 전략은 강력한 이익집단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경제를 점진적으로 개방하는 것도 반대에 부딪혔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것 역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국방예산을 축소하는 것 역시 군부와 군수산업의 반발을 가져왔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국내의 반발과 국제은행과 미국의 원조프로그램의 지속적인 반대를 넘어서는 것을 요구하였다. 박정희의 평등주의는 기득권층인 기독교 엘리트의 극심한 반대를 불러왔다. (박정희의 군사적 배경은 그를 우파인사로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는 사회주의, 평등주의적인 좌파에 더 가깝다. 이와 반대로 김대중은 공산주의자로 불렸지만 실제로는 오래된 기독교 지주계급과 엘리트들을 대변하였다. 김대중의 정치세력은 나중에야 발전하여 전라도, 학생들, 그리고 빈민층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반대세력은 기존 기득권층인 기독교 세력이었으며, 김대중이 그들을 대변하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러한 반대를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구축함으로서 넘어설 수 있었다. 그의 전략을 믿던 군부 내 장교들, 재벌 산업가들, 그리고 박정희의 제도 건설을 환영했던 정부관료, 그리고 지식인계층들의 동맹을 구축해서 박정희의 전략을 실현시켰다.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면이 과했던 점은 있지만, 지속된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반드시 필요한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반대세력과 심각하게 분열된 사회를 넘어서는 이러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다.

    박정희의 근대화 노력은 경쟁력 있는 재벌과 실력주의 정부관료체제 같은 견고한 제도와 기관들을 건설하면서 공고화되었다. (실력주의 기관들을 평등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로 본 것은 박정희가 모택동과는 다르나 등소평과는 유사한 면이다). 박정희는 실력 있는 정부 부처들을 만들어 나갔지만, 지속적으로 해외, 유학파 출신 인재들을 등용하고 씽크탱크의 조언을 들으면서 관료들이 안주하지 못하게 하였다. 박정희는 직접 젊은 한국인 학자들에게 (예를 들어 당시에는 켄터키 대학의 무명의 정치학 교수였던 나의 친구 김세진) 조국을 건설하는데 동참하기를 부탁하였다. 이 학자들은 씽크탱크에서 경제학, 교육, 예술 등 모든 분야를 다루게 하였으며, 그들의 정책제안을 정부정책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학자들에게 정책결정을 분석하는 능력을 훈련시킨 후 고위 관료직에 임명하였다.

    여기서 박정희의 한국은 중국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였다. 중국은 박정희의 유학파 등용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하나의 사상이 될 정도로 추구하고 있다. 중국에 따르면 세계화는 영국이 주도한 산업 세계화, 미국이 주도한 금융 세계화, 그리고 앞으로 중국이 주도할 인재 세계화가 있다고 한다. 박정희는 일본이 먼저 채택했던 해외유학의 전통을 훨씬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추락과 한국의 비상에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과 정부관료들이 유학 중이며, 한국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의 학생들이 유학길에 올라 있다. 한국은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켜 갔으며, 한국을 모방한 중국은 이를 넘어서 미래의 세계 리더십의 중심전략으로 채택하였다.

    등소평과 장저민은 박정희의 전략을 따라 했으며, 이는 세계를 변화시켰다. 등소평이 모택동의 자급자족, 반-지식인, 반-기업, 농민중심 전략을 거부한 것은 박정희가 이승만의 군사주의와 장면의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보다도 더 큰 변화였다. 중국의 성공이 박정희의 전략에 기반한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나아가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경제발전에서 교훈을 얻고 있으며, 이는 박정희의 유산을 개발도상국에 전파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기관형성과 경제적 성공은 대한민국을 구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없었다면 당시의 전문가들이 생각했듯이 북한에 비해 약하고 불안정했던 남한은 혼란스러움과 쇠퇴가 계속되어 결국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왔을 것이다.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미국 내에서 월남과 남한을 동일시하는 잘못된 유추로 인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자는 여론이 득세했을 것이다. 이른 주한미군의 철수는 필연적으로 약화된 경제적 관계, 줄어가는 외교 지원, 증가된 국내불만, 그리고 북한의 도발을 불러왔을 것이며, 남한이 패배할 수도 있는 전쟁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이 그렇듯이 박정희 역시 약점과 실패들이 있었다. 그는 훌륭한 정부부처들과 씽크탱크, 그리고 재벌 시스템을 만들어냈지만 정당 시스템을 제도화하지 않았다. 세계화에 대응한 움직임은 느렸으며, 한국은 아직도 중국처럼 보다 개방된 사회에 뒤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여기서의 개방은 무역, 투자, 인재에 대한 개방성을 말한다.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한국이 중국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1970대 말의 재벌위주 중공업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인플레이션, 불균형한 경제, 그리고 약한 중소기업 섹터를 초래하였다. 중소기업은 고용과 혁신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집권말기에 박정희는 경제적 성공이 불러온 위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경제발전은 복잡한 경제를 만들어 냈으며, 경제는 더 이상 청와대의 경제수석이 홀로 관리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교육받은 중산층은 더 이상 나라의 유일한 목표가 최대치의 경제성장과 국가안보 만에 머무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의 위협과 굶주림이 사라지자 민주주의와 인권 같은 가치들이 대두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에 안정성을 가져다 준 장치들이 불안정성을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 연결된 재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경영으로 이어졌고, 노동조합과 임금을 지나치게 억제한 것은 과격한 노조와 임금투쟁을 불러왔으며, 이는 20년후인 1998년 IMF위기때도 부정적인 여파를 가져왔다. 만약 김대중이 암살되었거나 학생운동이 진압되었다면 나라는 분열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은 성보다 발전된 경제, 정치적 시스템으로 점진적으로 이동하는데 성공하였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기관들과 엘리트들은 박정희식 통치에서 벗어나버린 국가에 균형을 가져오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박정희의 유산은 그의 실패보다는 성공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함을 증명하는 테스트이다. 박정희의 성공에 기반하여 한국은 개방된 경제, 활발한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었고, 이는 일본의 동맥경화와 태국의 분열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의 결과는 빠르게 상승하는 경제적 지위, 지정학적 영향력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다. 2015년경에 한국의 구매력평가 소득은 일본을 추월할 것이다. 한국은 오바마의 최고 동맹국이며, 미국보다 발전된 통신인프라를 갖고 있다.

    희망적으로 이것은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는 다음 어려운 과제에 남한이 준비되도록 하였다. 박정희는 군사, 정치, 경제를 북한보다 우월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성공의 결과로 인해 남한은 오늘날 모든 관점에서 남한보다 열등하며 썩어가고 있는 북한을 적으로서 두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 역시 어려운 과제를 남한에게 부여하고 있다.

    http://www.ash.harvard.edu/extension/ash/docs/parkjunghee.pdf

    2013.09.05 00:46 [ ADDR : EDIT/ DEL : REPLY ]
  20. Paris

    Anti 박님.. 많은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 본인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진실을 알고 있어서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깼다고 혹은 바른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분들도 다 잘 알고 판단하며 살고 있답니다 오히려 객관성 잃은 편향적 시각으로 세상을 잘못 읽고 있는 쪽이 누구인지 생각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정치적인 욕심 가진 분이 아니라면,,, 쯧!!

    2013.10.03 11:15 [ ADDR : EDIT/ DEL : REPLY ]
  21. 비수

    한심하기 짝이없네요 훗날엔 이글을쓴 자신이 부끄러워지는날이 오게될겁니다.

    2015.04.30 09:12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