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 독도에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진 독도 표지석이 독도에 설치됐습니다. 독도 표지석은 독도경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동도 망양대의 국기게양대에 설치됐습니다. 이번에 설치된 표지석 앞 면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친필로 '독도'가 뒷면에는 '대한민국',측면에는 '이천십이년 여름 대통령 이명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하고, 독도 표지석을 설치한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필자는 대통령의 독도 표지석을 보면서 그동안 독도 자료를 조사하면 알게 된 사람들을 떠올리면, 무조건 좋아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독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잊히고 버림받은 한국인들의 삶을 돌이켜보며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표지석'을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 독도 최초의 주민 최종덕의 기념비는 바다에 수장'
대한민국 독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던 섬이었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섬이자 식수가 부족해 사람이 살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도의용수비대가 있었던 시기도 보급품을 외부에서 조달하며 힘들게 살았기에 일반인이 살기에는 어려운 땅이 바로 독도였습니다.
이런 독도에 주민이 거주하게 됐는데, 그때가 1977년 봄이었습니다.
▲ 독도에 거주했던 어부 최종덕
울릉도 도동에서 어부로 살던 최종덕은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독도의 서도 동쪽벼랑 기슭 토담으로 벽을 치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입히는 간단한 집을 지었습니다. 단순히 독도로 이주했을 뿐만 아니라 1977년 10월초에는 주민등록을 '경북 울릉군 남면 도동 산63번지'로 옮겨, 건국 후 최초의 공식적인 '독도주민'이 되었습니다. (현재 독도 주소는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
무인도로 그저 버려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인식되던 독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한일 독도 분쟁에서 엄청난 사실이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은 한국 정부에 엄중하게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 1983년 일본외무성은 공식적으로 독도에 한국인 거주한다는 사실을 항의했다.
일본 외무성이 담화문을 발표할 정도로 중요한 독도 주민 거주 사실은 정부 공무원이 공식적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울릉도및 독도학술조사단'에 의해 밝혀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독도로 주민등록을 옮겼는데 정부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던 점이 무슨 이유일까요? 한일협정을 체결했던 박정희 정권은 독도를 이슈화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최종덕은 가족과 함께 이주하면서 "일본과 우리가 독도를 놓고 네 땅이다. 내 땅이다 승강이를 벌인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옛날부터 우리 땅이고, 우리 백성들이 고기를 잡아먹던 바다인데 새삼스레 땅싸움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라는 당연하고 태연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어부로 그저 고기를 잡으며 평생 내 땅에서 살기 원했던 최종덕이 죽자 유족은 '독도 최초 주민'이었던 고인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 하나를 독도에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어부 최종덕이 새겨졌던 원래의 표지석과 어부 최종덕이라는 이름이 훼손된 표지석
2008년 최종덕 기념비 건립위원회는 문화재청에 기념비 설치를 요청했으나 '기념비의 규모가 커 독도의 고유한 자연환경 및 경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불허했습니다. 그러자 최종덕의 딸 최경숙은 크기를 줄여 독도 서도 주민숙소 인근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문화재청은 빠른 시일 내에 반출해 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최종덕의 표지석은 바다에 수장됐습니다.
이 와중에 어부 최종덕이라는 글자가 훼손됐는데, 아무도 살지 않고 오로지 경비대가 있는 이곳에서 누가 왜 무슨 이유로 어부 최종덕이라는 이름을 훼손했는지 유족이 항의했지만, '정부,문화재청,독도경비대' 모두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 2008년 독도를 방문하고 표지석을 세운 한승수 총리
문화재청이 최종덕 기념비를 자연경관 훼손을 이유로 불허했지만, 2008년 한승수 국무총리의 독도 표지석은 허가(?)한 바 있습니다. 2008년 독도를 방문한 한승수 총리는 동도 헬리콥터 착륙장에 가로 32센티미터,세로 22센티미터 크기의 표지석에 '동해의 우리 땅 독도'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을 설치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일본외무성이 공식적으로 항의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인 독도 주민 최종덕을 기념하는 것이 훨씬 역사,외교적으로 중요한 일이지, 총리가 새긴 '동해의 우리 땅 독도'라는 표지석이 중요하다고 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최종덕의 기념비를 불허했고, 척박한 땅에서 살았던 최종덕을 기리는 기념비는 독도 앞바다에 수장됐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독도를 지킨 홍순칠을 고문했던 대한민국'
독도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던 사람이 바로 '독도수비대장 홍순칠'입니다. 그는 독도를 대한민국 정부가 버려두고 있을 때 직접 의용수비대를 조직해서 독도를 목숨 걸고 지켰던 인물입니다.
홍순칠이 독도를 지키게 된 배경에도 표지석이 나옵니다. 1952년 독도로 고기를 잡기 위해 갔던 울릉도 어민들은 '竹島(죽도) (日本領)일본령'이라는 푯말을 발견하고 경찰서를 찾아가 항의 시위를 벌입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문에 군작전 지휘권을 미국이 갖고 있던 시절이라 대한민국 정부는 군인은 고사하고 경찰 한 명조차 독도에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과 대원들
한국전쟁에서 다쳐 명예제대를 하며 고향인 울릉도에서 요양하고 있던 홍순칠은 이 소식을 듣자, 울릉도 거부 중의 한 명이었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설득해 당시로는 거금인 3백만 원과 힘들게 키웠던 60년생 해송을 벌채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민병대 조직을 위한 자금이 확보된 홍순칠은 무기를 구입하려고 육지로 나갔는데, 이때 무기 구입 이야기를 들어 보면 기가막힙니다.
'독도에 정력에 좋은 물개가 많이 산다는데 잡아다 줄 수 없냐' (육군 신모 중령)
'무기만 있으면 잡아다 줄 수 있다' (홍순칠)
민병대 자격으로 무기를 구입하려고 온 홍순칠에게 정력에 좋은 물개를 잡아달라고 했던 신모 중령이 준 무기가 고작 M1소총 2정과 실탄 2백발이었습니다. 결국 홍순칠은 부산으로 가서 미군부대에서 밀반출된 중기관총 1정과 실탄 5천발,M1소총 20정,실탄 2만발,수류탄 1백발을 2백만 원을 주고 구했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라고 명칭을 정한 홍순칠은 1953년 4월 36명의 대원들과 함께 독도에 상륙합니다.
▲ 독도 표지석을 설치한 뒤의 기념 사진, 이명박 대통령이 만졌던 '한국령'이라는 표지석도 독도의용수비대가 설치했던 표식이었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일본경비정은 물론이고, 일본 탐사선,일본 비행기에 맞서 수차례 교전을 벌였고, 그때마다 목숨을 걸고 독도를 지켰습니다. 병력과 화력이 열세였던 '독도의용수비대'는 정부에 수차례 무기와 실탄 보급을 요청했지만, 묵살 당했고, 소나무를 깎아 대포처럼 위장한 '소나무대포'로 일본경비정을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이 지킬 수 없는 독도를 지켜달라고 민병대 조직을 맡겨놨던 대한민국 정부는 이후에도 보급품은 물론이고, 실탄과 무기를 공급하지 않아 '독도의용수비대'는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으로 고통받았고, 이들이 힘들게 만든 식수는 후에 '독도 최초 주민 최종덕' 가족이 독도에 정착할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1956년 독도경비업무를 울릉경찰서에 인계하고 철수한 '독도의용수비대'는 그 후로 생업에 종사하며 살았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장이었던 홍순칠은 생업 중에도 독도 지킴이로 살았는데, 1974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보름 동안 고문을 받고 '앞으로는 절대로 독도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풀려납니다.
' 천연기념물 지정의 배경은 일본 차관?'
1980년 8.15 기념사에서 전두환은 갑자기 일본에 안보 협력 자금 60억 불을 요구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전두환은 이 발언과 함께 일본과 협상을 벌이고 1981년 1월 일본을 방문하여 40억불의 차관을 받아 옵니다.
▲ 전두환은 정권을 잡은 뒤 일본과 다양한 방법으로 차관을 끌어왔다.
일본과의 차관 협상이 벌어지던 무렵, 정광태가 부른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는 금지곡이 됐고, 목숨 바쳐 독도를 지켰던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은 신군부에 의해 다시 고문을 받고 나옵니다.
1982년 11월16일 문화재청은 독도를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합니다. 전두환의 군사 정권이 통치하던 시기에 문화재청이 스스로 나서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을까요?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 아예 독도에 사람이 출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쟁이 아니고서는 독도에 갈 수없는 일본 입장으로서는 굉장히 유리합니다.
▲ 일본이 제공한 차관이 대한민국이 아닌 전두환 생색내기에 사용됐다고 보도한 한겨레 신문
독도에 대한 언급도 출입도 통제하고 받아 냈던 일본차관이 어떻게 사용됐을까요? 합의된 40억 달러 중에서 겨우 10억9천만 달러만 들어왔는데, 그 중에서 경상도가 41.2%를 사용했고, 전체 사업의 10%이상이 전두환의 고향인 합천과 대구에만 집중적으로 투입됐습니다.
▲1953년 일본이 박았던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는 나무 말뚝을 뽑고 있는 한국산악회 회원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표지석'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독도에는 무수히 많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말뚝과 독도를 지키려고 목숨을 내걸고 살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표지석도 있습니다. 없애버려야 할 것을 철거했던 사람도 민간인이었고, 정부가 돌보지 않았던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도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들이었습니다.
천연기념물이라고 무조건 보호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도는 기상 조건상 수시로 많은 사람이 함부로 오고 갈 수 있는 땅도 아니고, 정해진 구역 이외에는 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천연기념물 훼손을 운운하며, 독도를 지키고, 그곳에 살았던 국민들의 역사를 정부가 방해할 필요도 막을 이유도 없습니다.
정부가 버렸던 땅, 오로지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만 이용했던 땅, 그 땅을 묵묵히 지켰던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들이었습니다.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인 표지석뿐만 아니라 그땅을 사랑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표지석이나 기념비도 함께 독도에 설치해, 후손들에게 우리 땅을 지켜준 그들을 알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주) 이명박 대통령 친필 독도 표지석이 불법시설물이라 문화재청에서 철거할 계획이랍니다.
MB친필 '독도 표지석'세우자마자 뜯길 판
▲ 출처:오마이뉴스 제공:경상북도
대통령 표지석 세우지 말라고 국민이 반대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남의 작품 위에, 절차를 무시하고 독도 표지석을 설치한다고 대통령의 독도에 관한 의지가 올바르게 전달되겠습니까? 제발 뭐든지 공정하고 올바르게 절차를 준수하며 할 수는 없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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