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1절 94주년입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3.1운동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분기점에 있는 사건입니다. '3.1만세항쟁'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대일 투쟁이 시작됐던 부분도 있지만, '3.1만세항쟁'의 기폭제였던 고종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종의 사망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퍼졌던 '고종 독살설'은 지방까지 미치지 못했던 근대사상과 유교주의가 합쳐 일본에 대항하게 하였고, 이는 점차 우리 민족의 사상이 왕권주의에서 민족주의로 나가는 배경이 됐기도 했습니다.
3.1만세항쟁이 시작된 배경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됐던 김규식의 국내 독립시위 주문도 하나였습니다. 김규식은 1919년 파리로 떠나기 전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독립 시위를 벌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김규식)
김규식의 이런 주문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가 1919년 조선을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고종이 돌연 사망했는데, 고종의 죽음 뒤에는 일본이 있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퍼지면서 3.1만세항쟁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됐습니다.
그동안 고종의 독살설을 두고 나왔던 다양한 자료와 얘기를 통해 고종의 죽음 뒤에 과연 누가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망명하려는 고종을 죽여야 했던 일본'
고종은 사실 근대사에서 무능한 황제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주요 인물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고종이 가진 상징성 때문입니다. 황실을 복원하려는 복벽파는 물론 민주공화파, 독립운동가, 모두에게 고종은 중요한 사람이 됐고, 그런 이유로 그를 해외로 망명하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었습니다.
1914년 이상설을 중심으로 세워진 '대한광복군 정부'는 고종의 망명을 위해 그를 만나려고 했지만, 고종 면담 직전 체포돼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1918년 우당 이회영은 다시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려고 했지만 1919년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패했습니다.
두 차례의 망명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고종은 망명을 위해 접촉한 인물들에게 모두 망명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죽지 않았다면 망명은 반드시 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해봅니다.
▲하세가와(2대 조선총독)/데라우치(초대조선총독)
일제는 퇴위했지만 점차 중요 인물로 부상하던 고종이 망명해서 해외에 공식적인 조선 망명 정부가 들어선다면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 있었을 것이고, 독립운동이 더한층 가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살아 있다면 계속 망명을 시도할 고종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 처참했던 고종의 시신이 말해준 독살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증거가 바로 고종의 시신이었습니다. 윤치호의 일기에 의하면 고종의 시신은 처참했는데,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 했고, 이가 빠지고 혀가 닳아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30cm가량 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고종의 시신뿐만 아니라 몇 가지 의문점이 '고종의 독살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1) 돌연 죽은 고종과 그의 죽음을 숨겼던 일본
고종은 1919년 1월 20일 병이 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에 나오는 얘기이고, 와병을 기록했던 순종실록 부록에는 어떤 병명인지조차 없었습니다. 고종은 1월 21일 새벽 6시에 죽었다고 하는데, 당시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는 그저 고종황제가 매우 위독하다고만 보도했습니다.
▲매일신보는 주식의 과반수를 조선총독부가 소유한 조선총동부의 기관지이자 1919년의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다.
일제는 고종의 죽음을 숨겼다가 하루 뒤에 '신문 호외'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렸는데, 당시 그의 사인은 뇌일혈이었습니다.
2) 재구성한 고종 독살설
'대동칠십일갑사(大東七十一甲史)'(작자미상)에는 보다 고종의 독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온 고종의 죽음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종이 죽던 날에 궁에 숙직했던 인물은 자작 이완용과 이기용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어의 안상호에게 집안의 미친개를 처리한다면서 독약 두 개를 받았습니다. 이완용은 무색무취의 독약을 어주도감 한상학에게 줬고, 한상학은 이를 두 궁녀에게 줬습니다. 고종은 궁녀가 올린 식혜를 밤중에 마시고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다가 반 시간만에 죽었습니다.
이완용의 사주를 받아 식혜에 독약을 탔던 궁녀중의 한 명은 1월 23일에 죽었고, 한 명의 궁녀는 2월 2일 기침을 하다 피를 토하고 사망했습니다.
매일신보는 궁녀가 독약을 탔다는 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밝혔지만, 궁녀들이 고종의 죽음 뒤에 석연치 않게 사망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고종의 독살설을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3) 새롭게 밝혀진 고종의 독살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고종 독살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의 일기였습니다.
“ 테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고종)에게 설명하게 하였지만, 고종이 이를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 민병석 등이 고종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 <구라토미 일기> 1919년 10월 30일 중에서-
구라토미의 일기를 보면 일제강점기 초대 총리였던 데라우치는 2대 총리였던 하세가와를 통해 윤덕영,민병석('한일병탄'(한일강제병합) 뒤 일본으로 자작 작위 받은 친일파)을 시켜 고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앞서 말한 이완용이가 고종을 독살했는지, 아니면 민병석과 윤덕영이 죽였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고종의 죽음 뒤에는 일제가 있었고, 이를 실행했던 사람은 친일파들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고종의 죽음은 무엇을 남겼는가?'
고종이 앞서 무기력한 황제였다고 했는데, 왜 그는 갑자기 3.1만세항쟁의 기폭제가 됐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고종황제가 이 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왕세자의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26일>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26일>
그렇습니다. 결론은 고종의 죽음이 한일병탄 뒤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없어지자 신처럼 추앙받던 임금조차 독살당했던 상황을 조선은 깨닫게 됩니다. 근대 사상이 아무리 전파되던 시절이었지만, 산간 지방은 오히려 유학이 남아 있던 시기였고, 이들 또한 근대 사상사들과 함께 '민족자결주의' 등을 고민하고 일제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조선독립광주신문 제1호
3.1 만세항쟁 당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발행된 1919년 3월 13일자 독립신문에는 전면은 민족대표 33인의 투옥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자는 내용과 고종이 한일합방을 거부하여 독살당했다는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미국 윌슨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를 소상히 설명하고 독립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후면은 광주지역 독립운동의 광경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신문은 4회에 걸쳐 발간했는데 모두 3.1 만세항쟁이 한창일 때 발행되었습니다.
이처럼 고종의 죽음을 통해 조선인들은 다양한 사상의 발전과 독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1921년 발행된 동아일보.경성감옥에 구금된 독립선언 관계자들.
3.1운동을 아이엠피터는 친일연구가의 한 명인 정운현 선생의 주장처럼 '3.1만세항쟁'으로 부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3.1운동은 단순히 '새마을 운동'과 같은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종의 죽음을 보면서 조선인들은 깨달았습니다. 조선 민족이 자주독립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202만여 명이 1,542회의 시위에 참여했고, 항일투쟁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만세의거를 벌인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별로 효용성이 없겠지만, 만약 고종이 해외에 망명해서 외교적으로 자주독립과 대일본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조금은 바뀌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독살당한 사건 등을 통해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2013년 3.1절'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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