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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가자 북의 낙원으로' 용공조작 삐라로 묻힌 '사학비리'


대표적인 사학비리로 손꼽히는 김문기 상지대학교 총장이 결국 국감장에 증인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김문기 상지대 총장은 천진공업대학의 총장도 아닌 교류협력처장의 초청만으로 중국으로 떠났고, 이를 핑계로 국감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김문기 총장의 아들 김길남 전 상지학원 이사장도 충치 발치와 임플란트 기초 치료 등을 내세우며 '건강'을 이유로 불출석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가 고의적으로 국감 증인에 출석하지 않으려는 꼼수를 부린 것으로 보입니다.

10월 8일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참석한 여야는 김문기 상지대 총장과 아들 김길남 전 이사장의 증인 출석 거부 사유가 말이 되지 않는다며 교육부 종합국감 때 다시 증인 출석을 요구하고, 불응 시 형사고발까지 검토하고 있습니다.

1993년 '사학비리 1호'로 퇴출당했던 김문기라는 인물이 다시 교육계에 등장해 국감 증인까지 나온 배경과 문제점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주:1]

' 상지학원의 설립자는 김문기가 아닌 원홍묵 선생이다'

상지대 김문기 총장을 상지학원의 설립자로 보도하고 있는 언론이 많은데, 이는 명백한 오보입니다. 상지학원은 원홍목 선생이 설립한 청암학원이 명칭만 바뀐 것입니다. 즉 상지학원의 설립자는 김문기가 아닌 원홍목 선생입니다.


교육부의 공문에서도 상지학원은 1974년 청암학원의 명칭만 변경됐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청암학원의 설립자는 원홍목 선생으로 1955년 원주지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관서대의숙을 세웠습니다. 1962년 재단법인 청암학원을 설립했고 1963년 1월 7일 원주대학을 설립했습니다.

현재의 김문기가 상지학원을 인수하게 된 배경은 정치라는 뒷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의 선거사무장으로 활동했던 김문기는 1972년 청암학원의 관선이사로 선임됩니다.

청암학원을 설립한 원홍목 선생은 모든 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노력했지만[각주:2] 사채 100만 원의 빚이 생기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당시 문교부 장관 민관식과 김문기가 서로 짜고 청암학원을 김문기에게 양도하도록 종용했던 것입니다.


청암학원을 인수한 김문기는 원주지역 군인들과 지역 학생을 위해 설립한 원주대학 대신 상지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당시 상지대학 설립인가서에 부지라고 제출한 토지는 원홍목 선생이 운영하던 고아원 부지[각주:3]였습니다.

김문기는 현금을 출연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통장의 잔액은 4만 9천 원짜리였고, 이런 엉터리 서류로 상지대학의 설립인가를 받았습니다.

있지도 않은 재산을 학교 법인의 재산으로 등록하고 현금 출연 약속도 전혀 지켜지지 않은 상황에서[각주:4] 김문기는 자신의 재산이나 재단 전입금도 없이 오로지 허위서류와 권력의 힘을 빌려 상지학원의 이사장이 됐습니다.

'부정입학으로 돈벌이했던 김문기'

처음부터 권력과 허위 서류로 학교를 인수한 김문기가 제대로 학교를 운영할 리가 없었습니다. 김문기는 상지대 개교 첫해인 1974년부터 무자격 학생을 입학시켰는데, 그 해만 무려 40명이었습니다.


1974년부터 이루어진 부정입학은 수십 년 동안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하게 무자격 입학생에게 등록금만 받는 방식이었지만, 가면 갈수록 거액의 돈을 받고 학생들을 부정하게 입학시켰습니다.

1991년 부정합격생들은 최하 2천만 원에서 4천만 원까지 돈을 내고 입학했습니다. 당시 부정입학으로 번 돈은 김문기의 사위 황재복이 받았고, 이 돈은 별도의 계좌에 입금해 비자금처럼 관리됐습니다.

황재복은 편입생 모집 업무와 무관한 직위에도 불구하고 면접을 보면서 '합격하면 학교 발전에 노력해라'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이 '찬조금을 내라는 것입니까?' 묻자 노골적으로 '그렇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답변하기도 했습니다. [각주:5]


개교 첫해부터 부정입학으로 문제가 발생했던 상지대학과 김문기는 1989년 3월 10일 자 신문광고를 통해 부정입학을 보도한 언론을 가리켜 '중상모략'이라는 광고를 게재했습니다.

김문기와 상지대학은 부정입학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문교부 감사 결과와 검찰의 수사로 결국 김문기는 1993년 3월 구속 수감됩니다.

김문기의 친인척이며 당시 상지대학교 교무부장이었던 김달기씨는 ' 부정입시 관계는 황재복 비서실장(김문기 사위)가 총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김문기씨가 교무과장에게 지시해서 명단을 다시 보고받는 방식으로 김문기씨가 직접 관여하면서 총괄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각주:6]

상지대학의 부정입학은 <김문기 지시 → 황재복 (사위) → 교수와 직원>으로 이어지는 완벽한 범죄를 꿈꾼 '사학범죄'였습니다.
 
'가자 북의 낙원으로, 용공조작으로 범죄를 숨기려고 했던 김문기'

1986년 10월 13일 상지대 학생들은 본관을 점거하고 밤샘농성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농성한 이유는 상지대학이 강사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천만 원의 금품을 받았다는 경향신문의 보도 내용에 대한 학교의 해명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학생들이 본관을 점거하고 있는 10월 15일, 갑자기 상지대 교정에 '가자 북의 낙원으로'라는 불온 유인물이 뿌려졌고, 경찰은 상지대총학생회장 한규길군 등 75명을 연행하여 조사했습니다. 

'가자 북의 낙원으로'라는 문구 자체만으로 구속될 이 불온유인물은 학생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상지학원 교직원이 제목과 구호만 써서 학교 복사기로 3백~4백여 장을 복사해 뿌린 것이었습니다.  특히 김문기의 사위 황재복은 화염병 등을 준비해 폭력시위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김문기가 학생들이 만들지도 않은 불온유인물을 조작해 뿌리고 화염병을 만든 이유는 사학비리 등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을 동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각주:7]

학생들의 농성 해산을 위해 공권력 투입을 경찰에 요구했지만, 경찰은 공권력 투입의 명분이 없다며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상지학원 교직원들은 불온유인물을 만들어 뿌렸고, 이 유인물을 안기부에 직접 전달, 경찰이 투입되어 학생들을 연행했습니다.  


불온유인물 때문에 안기부와 경찰이 출동했지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어 학생들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3~7일간의 구류처분에 그쳤습니다.


당시 불온유인물을 제작했던 김황일 학생주임은 양심선언과 국회 교육위원회 국감에서 학생들이 아니라 학교에서 불온유인물을 제작해서 배포했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김문기는 불온유인물 이전에도 영어교육과 전조영 교수를 학생 데모 배후 조종자로 용공조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용공조작을 했던 이유는 아무리 큰 비리도 색깔론만 입히면 숨겨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사학재단의 검은 커넥션'

김문기는 자신의 비리를 숨기기 위해 무고한 학생들을 용공분자로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용공조작 사실이 밝혀지자 김영삼은 대선 당시 민자당 대선 강원도지부장이었던 김문기보고 아예 유세장에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1993년 김문기는 사학재단을 운영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민자당 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당시 금융실명제 등으로 재산이 공개됐을 때의 김문기 재산은 185억 원으로 민자당 내에서도 3위였습니다.

김문기와 같은 사학재단 비리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세금으로 지원되는 교육 예산과 학생들이 낸 등록금을 마치 사유재산처럼 뒤로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1990년 김문기가 재단에 전입금이라고 낸 돈이 달랑 3,000원이었습니다. 상지대 학생들은 화장실 물을 식수로 사용해서 마셨고, 조리학과 학생들은 화장실 물로 조리실습을 했습니다. 오죽하면 상지대 학생들은 민주화 투쟁 당시에도 학도호국단을 해체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학교다운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달라고 요구했었습니다.[각주:8]


상지대 사태의 진실과 김문기의 비리를 폭로한 '가자 북의 낙원으로'라는 책에 대해 김문기 상지대 총장 측은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습니다.


상지대를 나와 기자로 활동했던 저자 홍석진 씨는 '국가기록원, 국회 속기록, 교육부 감사결과, 법원 판결문' 등을 근거로 책을 집필했습니다. 공적인 자료를 가지고 진실을 밝히는 행위를 명예훼손 운운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더 이상합니다.


상지대 사태가 수십 년동안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사학법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학법을 제대로 개정하려고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 등 한나라당의 반대로 이상해졌습니다.

한국은 범죄행위로 실형을 선고받았어도 5년만 경과하면 학교 법인 이사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만은 사학 이사들이 직무를 남용해 범죄를 저지르면 학교법인 임원 등으로 활동할 수 없도록 자격을 박탈하고 있습니다.[각주:9]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기는커녕 돈을 빼돌려 사유재산처럼 이용하는 사학재단의 족벌 경영체제가 가능한 이유는 정치인들이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검은 손을 끊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학교는 학문의 전당이 아닌 '황금알 낳는 오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1. 이 글은 홍석진 저 '가자 북의 낙원으로'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했으며, 저자 홍석진은 상지학원 학보사 기자 출신으로 상지학원 역사복원 위원장, 용공조작사건 진상규명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본문으로]
  2. 원홍목 선생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학교를 살린다고 모든 재산과 노력을 기울이는 덕분에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본문으로]
  3. 보육원 [본문으로]
  4. 김문기는 1974년부터 매년 3천만 원에서 3천 5백만 원의 현금을 출연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현금을 기부한 것은 1984년이 처음이었다. [본문으로]
  5. 홍석진 저 '가자 북의 낙원으로' 69P [본문으로]
  6. 홍석진 저서 '가자 북의 낙원으로 ' P70 [본문으로]
  7. 상지대에 대한 감사는 대부분 학생들의 농성으로 시작됐다. 김문기는 학생 농성 때문에 다시 감사가 나올까 겁이 났던 것이다. [본문으로]
  8. 1980년 5월 17일 학생회장 발언 [본문으로]
  9. 대학교육연구소 2014년 8월 20일 '상지대 사태, 박근혜정부 도덕성과 사학정책 시험대 될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