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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박정희식 '청와대 경호실'을 꿈꾸는 박근혜



박근혜 당선인은 현재 차관급의 대통령 경호처를 장관급 경호실로 승격시켰습니다.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지난 25일 총리실과 대통령실 조직개편안을 통해 현재 대통령실 경호처를 경호실로 격상한다고 밝혔습니다.

경호처의 경호실 승격은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대통령실 소속 경호처로 전환된 이후 5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단순히 이명박 정부의 경호처를 경호실로 승격하는 점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 하지만, 박근혜 당선인의 청와대 경호실 승격은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의 청와대 경호실 승격이 가진 의미와 과거 박정희 정권의 경호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통해 진정한 청와대 경호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경찰청장보다 높아진 경호실장'

이번에 박근혜 당선인이 승격시킨 경호처는 원래 차관 직급이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때도 경호처가 아닌 경호실이었지만 경호실장으로는 대부분 차관급이 임명됐기 때문에 15년간은 차관급이 경호실을 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당선인은 그동안 이루어졌던 차관급 경호실을 장관급으로 바꾼 것입니다.



장관급의 경호실장이 임명된다면 현재 전 국민의 치안을 맡은 경찰청장보다 더 직급이 높아지게 됩니다. 현재 경찰청장은 차관급이기 때문입니다.

경호처의 수장이 장관급으로 임명되는 배경 중에서 유민봉 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는 '경호처의 업무 과중에 대한 요구 사항을 당선인이 수용한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경호실 인원 충원 등 조직 확대에서는 '현재 큰 인원 증가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실질적인 인원이 보강되지 않아도 사기 측면에서 경호실 승격은 중요하다'고 밝힘으로 단순히'사기 측면'을 위해 경호실을 승격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호처가 대통령실에서 독립해 별도의 기관이 되면 경호실이 인사,조직,훈련 등의 독자적인 결정권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러면 경호실이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의 무소불위 '경호실'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박정희에게 여자를 대주던 경호실'

대통령 경호 업무는 처음에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경찰서가 설치돼서 담당했으나, 1960년 제2공화국에 들어서는 경무대가 청와대로 명칭이 바뀌어 경무대 경찰서가 폐지되고 청와대 경찰관 파견대가 설치되어 청와대 경비와 대통령 경호를 맡게 됩니다.

그 후 5.16쿠테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1963년에 법률 제1507호로 '대통령경호실법'이 제정되어 청와대 내에 경호실이 정식발족하여 대통령 경호업무를 맡게 됩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 경호실장을 역임했던 사람은 세 명입니다. 그중에서 초대 홍종철은 단 5개월만 근무했고, 나머지는 박종규가 10년 3개월을 차지철이 5년 2개월 동안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0년 동안 박정희를 경호했던 박종규와 10.26 당시 박정희와 함께 사망한 차지철이 누구였는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5.16 당일 아침 서울시청 앞에서 쿠데타군의 사열을 받고 있는 박정희 소장. 왼쪽은 박종규, 오른쪽은 차지철


박종규와 차지철은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 옆에서 그를 경호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쿠데타 성공 이후 박종규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으로 차지철은 경호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초대 홍종철 경호실장 이후 박종규는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 이전까지 박정희의 경호를 맡았고, 차지철은 박종규가 육영수 여사 사망으로 사퇴하자, 곧바로 경호실장에 취임했습니다.

박정희가 쿠데타부터 자신을 경호해줬던 인물들을 경호실장에 임명했다는 사실은 자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기에 자신 또한 쿠데타로 물러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호실장은 언제나 박정희를 따라다녔으며 최측근답게 박정희의 개인적인 활동(?)에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여자를 조달하는 일은 본래 경호실이 시작했다. 5·16쿠데타를 거사할 때부터 충직한 경호대장이던 박종규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박은 각하의 심기관리에서부터 술자리까지 챙겼다. 군대에서 부관이나 전령병이 지휘관을 잘못 모시면 전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는 말은 금언에 속한다. 그런 군사문화에 젖은 경호실장 박종규는 각하의 심기관리를 최우선 업무로 삼았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는 많은 비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어느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기자가 직접 박정희에게 물었다.

『영부인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부부싸움을 하신 겁니까?』

이 말에 대통령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

『어허, 음, 흠…』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

육여사는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온갖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게 해주는 경호실장 박종규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육여사는 박종규 거세계획에 착수한다. 이 계획에 동원된 사람이 당시 청와대 사정담당 수석비서관 홍종철이었다. 육여사는 홍종철을 은밀히 불러 박종규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규탄했다.

『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은 각하 곁에 놓아둘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이래서 홍종철은 극비리에 박종규 비리조사에 착수한다. 본인과 형제 친척들의 이권개입과 인사청탁 여부에서부터 사생활 비리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막강한 경호실 안테나에 안 걸릴 리가 없었다. 박종규의 귀에 사정수석실이 자신의 비리에 대해 내사하고 있으며 홍종철이 직접 지휘한다는 정보가 들어갔다. 박종규는 흥분했다. 그는 경호실에 있던 엽총을 집어들고 홍종철의 방에 뛰어 들어갔다.

『야, 이 새끼야, 네가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냐』

박종규는 분에 못이겨 엽총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그러나 총구는 천장을 향해 있었다. 그가 냅다 갈긴 엽총 탄알은 홍종철의 머리 위 천장에 맞고 튀었다. 홍종철은 박종규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다.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분신으로 누가 무슨 보고를 해도 경호사고가 나지 않는 한 문책인사 대상이 아니었다.

이 사건 후 대통령의 채홍사 일이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로 옮겨졌다. 술자리 마련과 여자 조달하는 일을 청와대에서 한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날이면 큰 낭패라는 생각에서 그 일을 비밀 공작수행기관인 중정으로 떠넘긴 것이다.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이 있는데다 공식적인 방문객도 많아 비밀스러운 일이 노출될 위험이 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일을 맡기엔 중정이 안성맞춤이었다. 국가기밀이라는 허울좋은 베일 뒤에서 각하의 술과 여자가 난무하게 된 것이다

송문홍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여당 총재 등을 향해 견제의 칼날을 겨누었던 박정희이지만 유독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와 차지철만큼은 신뢰를했고, 이들은 그런 신뢰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박정희를 향해 개인적인 취향까지 고려한 충성을 다했습니다.

▲ 경복궁 연병장에서 열린 국기하강식 행사에서 고위공직자,재벌 총수, 현역 장군들의 사열을 받았던 차지철


차지철은 육사에 지원했으나 떨어진 이후 포병 간부후보생으로 군에 입문했다가 제1공수특전단 중대장 신분으로 5.16쿠데타에 참여했습니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육군 중령 진급과 동시에 박정희의 밀지(?)를 받고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는데, 별을 달지 못하고 전역했던 한이 있었는지, 현역 장군을 경호실 차장에 임명하여 사열 받는 것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박종규는 1980년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이후 김종필,이후락 등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이때 계엄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부정축재액은 77억 3,342만 원 이었습니다. 경남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있다가 학생들의 반발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의 동생이었던 36세 박재규에게 이사장 자리를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경호실장들의 충성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권력을 하사했고, 이들은 그런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숨어있는 2인자의 파워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 박정희를 죽였던 김재규, 그 원인의 시작은 최태민?'

박정희를 죽였던 김재규가 차지철과 앙숙이었던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앙숙이 됐던 원인 중의 하나가 '새마음 봉사단'의 최태민 때문이라고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와 박근혜, 그리고 최태민이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계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차지철과 김재철이 앙숙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그게 이제.... 차지철하고 김재규가 최태민(1994년 사망. 전 육영재단 고문이사)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것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다.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 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을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 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205년 11월 중아일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차지철은 경호실장이었지만 매일 아침 대통령 비서실장보다 먼저 대통령을 만나 주요 시국 현안을 보고하고 관계기관에 대통령의 뜻(?)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차지철이 잘못된 정보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을 잘못 보좌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갈등이 10.26을 일으킨 하나의 계기로 볼 수있습니다.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최태민이 박근혜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인데, 그런 문제점이 경호실장에 의해 차단되기도 하고, 경호실장에 의해 사태가 더 악화했다는 점입니다.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이 단순히 차지철과의 앙숙 때문으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결국 청와대 경호실장이 가진 권력의 폐해가 분명 있었음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 청와대 경호실의 권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청와대 경호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호실장이 군 출신이 도맡아 하면서 군인사 임명이나 안보 등의 정책에 적극 개입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민간인으로는 처음 박상범씨를 청와대 경호실장에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은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엄청난 권력기관으로 부상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막강 권력을 유지했는지는 끊임없이 불거지는 '청와대 경호실 사칭' 사건입니다.

▲청와대 경호실 사칭 사건을 보도했던 1973년 동아일보와 청와대 경호처 직원 사칭 제보 안내문.


1973년 청와대는 8개월 동안 청와대 경호실 등을 사칭해 금품을 받았던 54명을 고발 조치했다고 발표합니다. 이렇게 청와대 경호실 직원을 사칭하는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났는데, 이는 청와대 경호실 직원이라는 그 자체가 권력자 측근으로 일반 국민에게 두려움과 특혜를 받을 수 있는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청와대 경호실 직원을 사칭하는 일이 종종있는데, 그런 단순한 사칭 이외에 박정희 시대의 경호실 인맥이라는 이유만으로 '특혜주'로 인식되는 일도 있습니다.

▲주식투자 카페에 올라와 있는 '박근혜 수혜주' 관련 뉴스와 글.


대선 전에 정치인 테마주들이 급등하기 시작하기도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능률교육 테마주였습니다. 그 이유가 능률교육 최대 주주가 '한국야쿠르트 윤덕병 회장'이고 그가 5.16당시 박정희의 경호실장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수십 년 전 경호실장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박근혜 수혜주'라는 말이 나도는 모습을 보면 청와대 경호실이 어떻게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식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짜 청와대 경호실의 문제점은 승격이 아닌 경호'

청와대 경호처의 경호실 승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대통령 경호를 위한 현실적인 대안 마련에 있습니다. 현재 청와대는 경호관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많은 구조입니다.

▲ 청와대 외부와 내부 모습,백악관 웨스트윙 구조,이미지출처:연합.청와대,한겨레


청와대 외부는 청기와가 깔린 팔작지붕의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한겨울에 쌓인 눈이 녹으면 순찰 중이던 경호실 요원들이 다치는 등의 사고가 있는 등 대통령을 효과적으로 경호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특히 내부를 보면 동선이 너무 길어 유사시 대통령을 보호할 수 있는 경호 구조가 아닙니다. 이에 반해 백악관은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유사시 방으로 피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청와대 경호실 어려움의 근본대책은 경호처를 경호실로 승격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호 형태로 청와대 외부와 내부를 변경하는 일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청와대 본관 구조변경을 검토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비실용적인 측면 때문이었습니다.

▲청와대 구조, 이미지출처:한겨레


백악관 내부 사진을 보면 대통령과 비서,보좌관들의 집무실의 거리가 가까워서 수시로 비서관과 참모 회의가 열리지만, 청와대는 보좌관이나 행정관,비서관이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말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참모들이 있는 위민관에서 대통령이 집무하는 본관까지 가려면 500미터 정도를 가야 하고, 이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경비초소를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은 혼자서 집무실에 일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소수의 경호실 직원이나 비서 등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보기 어렵습니다. 이는 옛날 왕조시대 '구중궁궐'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박근혜 후보의 '그날의 상처' 선거 광고. '죽음의 문턱'이라고 했지만, 법원은 면도칼 상해 살인미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박근혜 당선인의 경호실 승격을 두고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사망이나 자신의 면도날 테러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호는 어떤 정신적인 충격 이전에 효과적인 경호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있는 것이지, 경호관 인력 증가는 하지 않고 수장만 장관으로 임명한다고 경호체계가 더 강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 경호를 맡고 있는 비밀경호국(Secret Service, 약칭 SS)의 경호실장은 어떤 정치적 인사가 맡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통령 출신지의 SS 지부장이 발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면으로 경호실을 운영하는 한국에 비해 철저히 효율적인 경호 업무를 전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경호원의 경호를 받고 있는 모습.출처:연합뉴스.


박근혜 당선인이 청와대에 있었던 시절, 많은 사람들이 최태민 문제를 거론했지만 결국 흐지부지 넘어갔습니다. 이는 박근혜 당선인이 자신을 믿는 사람을 끝까지 믿는 '신뢰'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문제가 있는 인사가 또다시 임명되거나 박근혜 당선인에 대한 '충성'이 우선적인 인사 임명의 원칙이라는 점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외부 공개를 최소화하는 박근혜 당선인의 스타일상 대통령과 함께하고 면담자도 모두 보고받는 대통령 경호실장의 영향력은 더 커질 수 있으며, 이는 아버지 박정희처럼 심복을 경호실장으로 임명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가뜩이나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발표하는 현재의 박근혜 당선인의 모습을 보면 '구중궁궐'에 갇혀있는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 폐쇄성 때문에 집무실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로 옮기려고 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청와대의 구조를 변경하려고 했습니다. 모두 무산됐지만, 이는 대통령이 적극적인 소통을 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는 대통령 당선인이 소통보다는 자신의 철저한 경호부터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5년간은 '국민과 소통하는 대통령'보다는 '청와대에 갇혀 있는 대통령'을 볼 기회가 더 많으리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