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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선 전날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처음부터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순탄하게 올라온 박근혜 후보와 수많은 지역 경선을 뚫고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사건을 치렀던 문재인 후보의 양자 대결이 내일로 끝이 납니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비록 하루 남았으니 선거 유세만 하기에는 문재인,박근혜 두 후보 모두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그것은 역대 대선 전에 항상 막판 변수가 발생했었고, 이는 크든 작든 선거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과거 대통령 선거 막판에 생겼던 변수를 통해 18대 대선을 하루 앞둔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려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다스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 13대 대선에 불어닥친 북풍(北風)'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직선제가 열린 대통령 선거는 13대부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필자는 박정희의 5.16 쿠테타 이후 열린 대통령 선거는 군정 연장의 기간으로 보고 있음) 기나긴 군사독재의 기간을 6.10항쟁으로 이겨낸 대한민국은 1987년 그토록 고대하던 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대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대선을 하루 앞둔 12월 15일 KAL 858기 테러범이라고 불리는 김현희가 국내로 압송됩니다.

▲ 1987년 대통령 선거일의 조선일보 1면, 대선보도 옆으로 KAL기 폭파범 김현희의 압송기사를 1면에 실었다. 출처:조선일보


김현희, 당시 언론에 보도된 마유미의 등장은 '안보'에 대한 불안과 위기론을 극대화했고, 이는 전두환의 친구이자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던 민자당 노태우의 당선에 막대한 공헌을 합니다.

국정원 과거사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KAL 858기 폭파사건(1987년 11월)을 수사한 당시 수사팀은 KAL 858기 실종 이후, 이 사건을 12월16일 대통령 선거에 활용하라는 지침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1987년 동아일보의 1면 노태우 당선 기사. 출처:동아일보


결국, 사건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그 사건을 대선에 이용하는 변수로 만든 것은 당시 정권의 인위적인 조작이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14대 대선, 오히려 역풍을 맞다'

1992년 대선에는 선거인 전날은 아니고, 선거를 사흘 앞둔 12월 15일 '초원복집'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모여 3당 합당으로 대통령 후보가 됐던 당시 민자당 김영상 후보를 밀어주자는 회의를 했고, 이를 정주영 국민당 후보 측에서 도청을 통해 알아내 폭로한 사건이었습니다.

▲1992년 초원복집 관련 동아일보 1면 기사.출처:동아일보


대한민국 정부기관장들의 이런 불법적인 선거개입은 당연히 여당 후보의 낙선으로 이어질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 사건은 야당 후보들이 역풍을 맞게 됩니다.

 

▲1992년 초원복집 관련 동아일보의 바뀌어진 논조.출처:동아일보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첫 번째는 '도청'이라는 부도덕성에 대한 공격이 철저하게 여당 주도하에 언론을 동원한 여론 왜곡이 있었고, 두 번째는 경상도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이상한 지역감정이 일어나면서 보수 유권자의 결집이 더 단단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이가?"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돼."
"다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 되면 부산·경남 사람들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부산지역 기관장들이 초원복집에서 했던 얘기들)


1992년 일어난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들은 김기춘 (전 법무장관), 김영환 (부산시장), 우명수(부산시교육청 교육감), 정경식 (부산지검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김대균 (부산지구 기무대장), 박일룡(부산경찰청장),박남수(부산상공회의소 회장),강병중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등 9명이었습니다. 

▲ 1994년 초원복집 사건 주역들의 복귀를 보도한 기사, 출처:한겨레 신문


'초원복집'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작당을 했던 이들은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1994년 화려하게 다시 복귀하는데, 박일룡은 경찰청장으로 경찰 총수로 정경식 지검장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이들과 반대로 '불법적인 범죄행위'를 폭로했던 국민당 정몽준 의원 등은 오히려 징역 1년씩의 구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14대 대선에서 일어난 '초원복집' 사건은 선거 범죄와 부정 폭로가 대한민국 대선에서는 어떻게 뒤바뀔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15대 대선, 이인제를 막아라'

1997년에 치러진 15대 대선의 가장 큰 변수는 IMF를 유발했던 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위해 신한국당을 해체하고 한나라당을 창당했던 이회창과 'DJT 연합'을 구축한 김대중 후보 사이에 있던 이인제였습니다.

이인제는 당시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뒤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는데, 이회창과 사이에 있던 보수표를 얼마큼 자신에게 끌어오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이런 이인제의 움직임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보수언론들은 철저하게 이인제를 이회창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습니다.

▲조선일보의 15대 대선전날 1면 기사. 출처:조선일보


이인제가 가졌던 영남표 분산이라는 역할을 조선일보는 철저하게 막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보수언론의 노력은 이인제의 국민신당을 철저하게 공격했고, 그들을 이인제가 아닌 이회창으로 돌아서게 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였다는 결과를 놓고 보면, 양자 간의 대결뿐만 아니라 제3세력이 가진 힘이 어떻게 작용하고, 대선에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있었던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16대 대선 전날까지 고통받았던 노무현'

2002년 15대 대선의 가장 큰 사건은 정몽준 노무현의 단일화와 선거 전날 일어난 '정몽준의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였습니다. 정몽준은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깨고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갑자기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습니다.

▲12월18일 심야에 정몽준 자택을 찾은 당시 노무현 후보의 모습. 출처: 동아일보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늦은 시간에도 정몽준의 자택을 찾아 그 앞에서 기다렸지만, 끝내 정몽준은 노무현을 외면했고, 심야회동은 무산됐습니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노풍이라는 뜨거운 열기를 받았지만, 철저하게 정치적 박해를 받기도 했으며, 정치세력들에 의한 배신을 계속 맛보았습니다. 특히 경선에 참여했던 이인제는 탈당하여 이회창을 지지하기도 했고, 정몽준과의 피 말리는 단일화 합의는 선거 운동보다 단일화가 더 여론의 관심을 끄는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치세력에는 배반을 당했지만, 국민에게는 오히려 지지를 받았던 16대 대선 후보 노무현의 모습을 통해 국민과 정치세력, 누가 더 중요한지를 깨닫기도 했던 대선이었습니다.

'17대 대선, 주어가 빠진 BBK'

2007년 대선에서 가장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 중의 하나가 'BBK'였습니다. 이 BBK 실소유주가 이명박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됐었는데, 선거 사흘을 앞두고 이명박 후보의 BBK 설립 관련 동영상이 공개됩니다.

▲이명박 후보 사퇴를 촉구하는 시민단체가 이명박 후보의 BBK 광운대 동영상을 보고 있다. 출처: 세계일보


대선을 3일 앞둔 2007년12월 16일 온라인에서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2000년 광운대에서 연설한 BBK동영상이 나돌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내가 BBK 설립했다 한 적 없다'라는 유명한 주어가 없으니 상관이 없다는 발표를 하기도 합니다.

이명박 후보의 BBK 동영상이 공개됐지만, 선거는 이미 '경제대통령'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던 보수표의 결집은 절대 요동치지 않았고, 정치세력 간의 이해타산에 실망했던 야당 지지자들과 중도층은 아예 투표를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한나라당 이명박은 '사상 최대 표차 압승'이라는 영광과 함께 '사상 최저 득표율'이라는 이상한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대선후보간의 검증이나 공세를 모두 네거티브라는 단어로 통합.대선 법칙은 '아이엠피터'만의 생각일뿐 정치평론가와 차이가 있을 수 있음


13대 대선부터 일어난 사건을 조사하면서 '아이엠피터'가 알아낸 법칙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안보론이라는 무기는 아직도 남북이 대치한 한국에서는 보수층을 결집하는 무기이자 최대의 효과적인 대선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이유로 새누리당은 NLL을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3세력이라 불리는 정치세력의 역할과 파워는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 존립하기 어렵습니다. 여론이 어떻게 그들을 몰고 가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그러나 앞으로는 정치세력보다 국민적 지지의 크기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여당을 향한 네거티브 공세는 보수표 이탈과 전혀 무관하면서 오히려 섣부른 네거티브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14대 대선의 '초원복집' 사건이 지금의 '국정원 댓글'사건과 유사하면서 흘러가는 양상은 비슷하다는 점은 깊이 새겨봐야 할 대목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언론사의 여론조작은 아직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온라인에서 민심이 변하고 있다고 해도 50대 이상은 온종일 종편이나 MBC와 같은 언론을 보고 있기에 그들의 왜곡을 그대로 믿고 그것을 진실처럼 떠든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대선을 조사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상식과 진실의 변화보다 '경제','안보','언론'의 왜곡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나라당으로 당명이 왜 바뀌었는지, 새누리당이 왜 당명이 바뀌었는지 사람들은 벌써 잊었습니다. 오로지 대선을 앞두고 바뀐 그들의 모습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대선을 하루 앞두고 많은 것이 변하거나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동건급 연예 사건'이 터져 나온다는 정치블로거의 아내의 말도 있지만, 그런 모든 것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바뀔 수 있습니다. 투표할 계획이 없던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 그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투표를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유권자로 투표했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 자랑스러워하는 풍토로 변화될 수는 있습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 투표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잠들어 있는 우리 요셉이와 에스더의 미래를 위한 아빠와 엄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투자이자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