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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머나먼 정글'에 묻힌 해병의 죽음을 파헤치니



매년 현충일이 되면 저희 가족들은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습니다. 다른 가족에게 현충일은 그저 쉬는 날이겠지만, 제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현충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될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저희 작은 아버님께서 안장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에는 할머님이 준비하시는 통닭에 부침개에 맛난 음식을 먹는 즐거움으로, 승용차도 없이 음식 보따리를 들고 정문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지금은 할아버지,할머님이 모두 돌아가셨지만, 저희 집에서 작은 아버님은 늘 애틋한 존재였습니다. 

특히 저희 할머님은 살아생전에 결혼도 못하고 돌아가신 작은 아버님의 묘비를 부여잡고,매번 울면서 현충원을 내려오시곤 했습니다.




작년에 가족들과 동작동 국립묘지에 갔을 때 조카가 묘비에 적힌 비문을 보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삼촌,작은할아버지는 한국 사람인데 왜 월남에서 전사라고 적혀있나요?"

조카의 질문에 무어라 답을 해줄까 고민했습니다.
공산주의를 막아내기 위해서? 아니면 용병처럼 돈을 벌기 위해서?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해서?
저에게 이론적으로 조카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논리와 역사적 지식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전사한 작은아버님같은 젊은 분들에게 어떤 생각과 사상이 있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저 나라와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용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만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월남전은 영화로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영화에서 이야기했던 모습을 통해 그 당시 미국의 정치 상황과 세계정세,동성애,인종차별, 흑백갈등,마약의 문제점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월남이라는 나라에 어떤 이유로 한국이 파병되었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었던 우리의 젊은이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카의 물음과 함께, 도대체 작은 아버님은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작전을 수행하다가 전사하셨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해병대 사령부, 월남전쟁 관련 책자,해병대 전투 논문 등 많은 자료를 뒤져도 작은 아버님 이름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해병대 전우회 게시판에서 겨우 낯익은 이름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해병대 전우회 게시판에서 그날 함께 전투에 참여하신 전우분의 전우찾기 글에 저희 작은 아버님의 이름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작은 아버님과 다른 해병대원의 명복을 위해 매년 현충원을 방문하고, 그 당시 전우를 찾는다는 글이었습니다.

함께 있었던 당시 전우분의 증언과 해병대 전사 자료집에서 전사하신 그날의 기록과 이야기를 찾아 내었습니다.


임갑구 일병(전사와 함께 일계급 특진으로 상병추서)
해병 2여단 (월남 파병 청룡부대) 1대대 2중대 1소대
1967년 5월 22일 추라이 뇌룡작전 중 사망

■ 뇌룡작전
1967년 5월18일에 개시된 뇌룡작전은 적의 근거지인 다수의 동굴과 보급처를 공략하는 작전이었습니다. 5월 27일까지 9박 10일간 펼쳐진 작전에서 69개의 적 동굴 기지가 파괴되었으며, 147명 사살과 60명의 추정 사살, 포로 6명 생포, 포탄 및 지뢰 1,334발의 노획 성과를 거둔 성공적인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으로 1대대와 2대대 인원 중 15명이 전사를 했고, 45명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저희 작은 아버님은 뇌룡작전 중 전사한 15명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5월22일 그날 작전 중에 함께 전사한 사람은 저희 작은 아버님 이외에도 몇 분이 더 계셨습니다.


성공한 작전이었지만, 결국 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고귀한 젊은이의 목숨이 사그라졌고, 그중에 저희 작은 아버님도 계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해병대를 높이 평가하고 짜빈동 전투와 같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성공한 작전을 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해병 2여단 (청룡부대)에서만
무려 1,155명의 젊은 목숨이 머나먼 정글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오로지 영웅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영웅도 매년 현충일이나 권력자의 홍보용으로 전락하는 세상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을 폄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며, 우리나라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고자 합니다.


저는 연평도 전투로 전사한 고 서정우 하사와 문광욱 일병에 관한 포스팅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韓國/정치] - "휴가 좀 가자"故 서정우병장의 마지막 소원.

그 후에 최주호 병장에 관련된 글을 한 편 올렸습니다.

[韓國/정치] - 연평도 포격 해병들이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

이 글이 올라오고 난 뒤에 고 서정우 하사의 어머님이 방명록에 글을 남기셨습니다. 어머님은 최주호 병장 어머님의 글 중에서 서정우 하사가 전사할 당시의 생생한 장면의 문구를 삭제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밤마다 서정우 하사의 참혹한 전사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가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문구를 삭제하면서,젊은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어머님의 고통은 우리는 상상도 못할 아픔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저희 큰 집에 남아 있는 작은 아버님의 편지에는 제가 군 시절에 적었던 편지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 삼촌이 제대하면 우리 조카들 맛난 음식도 사주고, 함께 놀러가자."
" 삼촌은 대한민국의 남자라서 하나도 안 무섭고 늘 용감하게 싸운단다."
" 할머님 말씀 잘 듣고 언제나 공부 잘하고 씩씩하게 커야 한다."


작은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아마 지금 예순이 훨씬 넘으신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전사하셨을 때에는 젊디젊은 20대의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낯선 나라의 우거진 정글에서 피를 흘리면 돌아가셨습니다. 그에게 엄청난 용기와 담력이 있어서 총알이 빗발치는 그 무서운 전장에서 늘 당당하게 전투에 임했을까요?

무섭고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또 참고 견뎌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려고, 다시 고향의 품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한 줌의 재로 고향이 아닌 전우들과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 재벌, 언론사 사주 가족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습니다.한국의 젊은이들이 머나먼 정글 속에서 목숨 걸고 싸울 때 저들은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인사청문회를 비롯한 이명박 대통령 사람들은 어떻게 군대 안 갖다 온 사람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참배객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전사한 사람을 기억하는 가족도 이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돌아가신 사람들 대부분이 결혼하지 못한 어린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부모가 돌아가시자 그들을 기억하며 국립묘지까지 오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과 기억은 누구에게나 힘든 추억입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잊혀진 사람들이 된다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로부터 모든 굳은 일과 힘든 일은 국민이 감내해야 했습니다. 정치가나 권력을 가진 자, 돈이 많은 재벌에게 전쟁의 위험에 몸을 내던지는 일은 생각조차 필요없는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권력자의 아들이 아니거나 돈이 없는 평범한 국민은 군대에 가야 합니다. 그래서 몸을 다치고 전사하고,고통 속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우리 같은 지극히 보통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저는 국립묘지의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 영웅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싶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그저 가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소박하고 우직한 마음으로 그 무섭고 떨리는 전장에서 고귀한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아도,저는 제 아이들에게 그들을 영웅이라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만든 영웅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묵묵히 그 길을 갔던 작은 영웅이 많단다, 그 작은 영웅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대한민국을 지켜낸 진짜 영웅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