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2015.04.03 09:10

오늘은 67주기 제주4.3국가추념일입니다. 이 글은 제주4.3사건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하고 있는 다큐소설의 일부입니다.(19금에 해당하는 내용 다수 포함) 제주4.3사건을 기록한 '4.3은 말한다' (제민일보 4.3취재반)와 '4.3사건의 진상'(오성찬),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나온 증언을 기초로 했습니다. 등장인물 등은 가명이며, 제주어로 된 증언자의 이야기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표준어로 바꾸었습니다. 글 속에 있는 그림은 강요배 화백의 화집 '동백꽃 지다'에서 발췌했습니다.

 

 

#그 남자 1

 

해방이 됐다. 제주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일본군이 드디어 제주를 떠났다. 해방된 조국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 먹을 것이 없어 물질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들풀을 뜯어 먹던 아이들이 책상에 앉았다. 칠판에 한글로 내 이름을 적었다. 도대체 얼마만 인가?

 

일본에 끌려가 공장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했다. 다시는 노예처럼 살기 싫었다. 학교 시설은 낡고, 식량 사정이 나빠 아이들 얼굴이 영양실조로 누렇게 떴다. 굶주린 아이들이지만, 수업시간에는 나만 쳐다봤다.

 

교사 모임에서 어릴 적 동네 아이를 만났다. 이제 스무 살, 어린 나이지만 당찬 선생이 되었다. 곱디고운 얼굴과 가냘픈 몸매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다부졌다. 교사들의 모임이 끝난 뒤, 그녀를 쫓아가 고백했다. '양 선생, 평생 어떻게 하면 좋은 스승이 될지,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동료 교사들의 축복 속에 약혼했다.

 

동네에 깡패 같은 남자들이 들어왔다. 북한에서 넘어온 서북청년단이란다. 서청은 이승만 사진을 팔러 다녔다. 안 사주면 야쿠자처럼 가게 물건을 엎었다. 학교까지 찾아왔다. 교실에 있던 이승만 사진이 낡았다며 바꿔야 한다고 했다. 얼마냐고 물었더니 쌀 한 가마니 값을 내란다. 대쪽같은 교장은 서청을 향해 나가라고 소리쳤다. 서청은 교장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고 젊은 나는 몸을 던져 서청의 몽둥이를 막았다.

 

다음 날 서청은 총을 들고 나타났다. 서청은 교장과 나를 술 공장 창고로 끌고 갔다. 창고에 가보니 형님도 잡혀 왔다. 서청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팼다.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끌고 가 총으로 쏴 죽였다. 총살장으로 끌려가는 형님을 부르다 얻어맞았다. 겨우 형의 발목 한 번 만졌다. 마지막 인사였다.

 

서청은 무자비한 구타를 하다가 심심하면 남자와 여자를 불러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교를 강요했다. 여자들의 옷을 벗겨놓고 국부를 지지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성교를 거부하면 고문을 했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묶어 공중에 매달고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맨살을 지졌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나도 형을 따라가야 한다. 갑자기 서청 사람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남 상사가 나를 불러냈다. '양선생 아나?','제 약혼녀입니다.'하자 남 상사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성산 일출봉 해변에 숨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술 창고에 갇혔던 남자 40명 중 28명이 죽었다.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천운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그 여자 1

 

어릴 때부터 선생이 되고 싶었다. 일본도를 차고 일본말로 천황 폐하를 외치는 무서운 선생은 되기 싫었다.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며 수재소리를 듣던 동네 오빠에게 수줍게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선생이 될 수 있나요?' 오빠는 조선말을 잊지 말고 공부하라고 했다. 반드시 조선은 해방된다고 했다. 해방된 조선에서 오빠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는 상상만으로 행복했다.

 

일본으로 끌려갔던 오빠가 돌아왔다. 옆 마을 국민학교 교사가 됐다고 했다. 오빠 덕분에 나도 선생이 됐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읍내 교사 모임에서 오빠를 만났다. 오빠가 나와 함께 평생 살고 싶다고 했다. 조선이 해방된 얘기만큼이나 기뻤다.

 

오빠가 서청에 끌려갔다. 오빠가 잡혀간 창고로 갔지만, 우락부락한 서청 사람들은 면회를 시켜주지 않았다. 끌려간 남자들이 하나둘씩 시체로 나왔다. 누군가 서청 간부에게 돈을 바치라고 했다. 결혼할 때 쓸려고 모아 놓은 돈을 들고 서청 간부를 만났다. 

 

술을 마시던 서청 간부는 벌게진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옆에 앉아 술을 따르라고 했다. 벌벌 떨면서 술을 따랐다. 서청 간부가 갑자기 나에게 덤벼들었다. 옷고름을 찢고 가슴을 움켜쥔 억센 손을 온 힘을 다해 뿌리쳤다. 갑자기 서청 간부가 '김 선생을 살리고 싶지 않은가 보지?'라고 말했다. 그날 밤 서청 간부는 아랫도리가 헐어 피가 나올 때까지 내 몸에 올라타 내려오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그저 '우리 오빠 살려줍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남자 2

 

살아나자마자 보고 싶던 약혼녀의 집으로 갔다. 약혼녀는 나오지 않고 동생이 나와 '언니는 결혼했으니 이제 오지 마라'고 했다. 불과 한 달 만에 어떻게 나를 버리고 결혼했는지 분노가 치밀었다.

 

약혼녀가 결혼해 사는 집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버렸느냐고? 몰래 집 앞에 갔더니 약혼녀가 남편에게 맞고 있었다. 남편은 서청 간부였다. '이렇게 살려고 날 버렸니?. 깡패 같은 서청 간부가 그리 좋았냐'고 묻고 싶었다. 곱디고운 얼굴이 엉망이 된 모습을 보니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약혼녀의 동생이 나타났다. '언니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 서청 간부에게 몸을 바치고 결혼했어요'

 

내가 죽었어야 했다. 고문을 받다가 혀를 깨물고 죽었어야 했다. 서청이 여자들을 겁탈하고 고구마를 쑤셔대며 시시덕거릴 때, 덤비다 맞아 죽었어야 했다.

 

'오빠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될 수 있어요'라고 묻던 어린 소녀가 비에 떨어진 동백꽃처럼 바람에 날리 운다. 

 

 

<4.3은 말한다에 수록된 증언 중에서>

 

49년 3월 3일에는 한 군인이 처녀를 강간하려다 반항하자 총살한 사건이 벌어져 가족과 주민들을 분노케 했다. 군인의 겁탈을 죽음으로 막은 희생자는 강매옥(姜梅玉, 19, 이명 강명옥)이었다. 강매옥의 언니인 강경옥 씨는 지금도 학살자의 성씨와 얼굴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 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지요.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맘대로 되지 않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姜景玉(78. 안덕면 감산리)의 증언

 

이북 출신 경찰관 노(盧) 순경은 한 처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김용식(金龍植, 20)에게 시집을 갔다. 앙심을 품은 노 순경은 1949년 3월 22일 중산간 순찰 때 마침 민보단원이던 김용식과 같은 조에 편성되자 그를 총살했다. 토벌대는 또 부녀자 겁탈을 밥먹듯 했다. 한 주민은 이를 ‘처녀토벌’이라고 말했다. 주로 소개민이 당했지만 김녕리 주민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밤만 되면 부녀자들은 숨기에 바빴다.

 

박 할머니에게는 스무살 가량의 오아무개란 손녀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손녀를 데리고 성산포에 있는 딸의 집에 가서 살았지요. 그런데 그 손녀는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었습니다. 서청이 그녀를 탐했지만 할머니는 완강히 막았습니다. 화가 난 서청은 오후 2시께 그 할머니를 대로상으로 끌어내 총살해 버렸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서북청년단은 무법자들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친위부대였던 서청 단원들을 경찰이나 군인으로 채용했다. 서청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미군정이나 경찰 간부들은 겁간과 학살을 자행하는 서청 단원들을 격리하기도 했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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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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