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2014.06.10 07:37


오늘은 1987년에 6월 10일 9시에 방송됐던 'MBC 뉴스데스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987년 6월 10일 MBC 뉴스데스크는 아홉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오늘 열린 제 4차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 대표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라는 앵커의 설명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땡전 뉴스'라고 하는 말이 여기서 유래됐습니다. 아홉시라는 시간을 알려주는 땡 소리와 함께 항상 전두환의 근황을 먼저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1987년 6월 10일 MBC 뉴스데스크의 주요 뉴스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대표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노태우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던 1987년 6월10일, 대한민국 국민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987년 6월 10일 열릴 예정이었던 '6.10대회' 행사장 입장을 막기 위해 160개 중대 2만 2,000명의 경찰이 행사장 주변과 거리에 배치됐습니다.

행사장 입장이 가로막힌 시민들은 오후 1시부터 거리로 나왔고, 서울 시내를 비롯한 전국 18개 도시에 시민 24만여 명은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날 학생과 시민들은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는 노래를 부르며 '호헌철폐,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고, 서울,부산을 비롯하여 마산과 대구, 포항과 울산, 안동, 경주, 광주, 전주, 대전, 청주와 천안, 춘천과 목포, 군산, 인천 등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재임 중 대통령 후보가 선출된 날,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왜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을까요?



1987년 1월 13일 자정에 서울대생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됩니다. 이들이 박종철을 연행한 이유는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분실에 도착하자마자 박종운의 소재를 자백하라며 폭행과 전기고문,물고문을 받았습니다.

밤새 고문을 받던 박종철은 14일 오전 11시 45분 물고문 도중 남영분실 509호실에서 사망합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14일 오전 6시 40분 연행, 오전 11시 45분 사망으로 발표됨)


박종철이 사망하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초등학생도 믿지 못할 내용을 사건 브리핑이라고 내놓았습니다.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민당과 재야단체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미사에서 '치안감 박처원,경정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 간부들이 사건을 축소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재야단체와 시민들은 5월23일 '박종철군 국민추도'를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으로 바꾸고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고, 이날 전국 22개 도시마다 시민들이 모였습니다.

 


6월 10일 거리에 모인 시민들이 '호헌 철폐'를 외친 이유가 있습니다. 박종철을 고문 살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두환 군부독재가 만들어 놓은 대통령 간접선출이라는 헌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대통령 간접선거는 말 그대로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것이 아닌 대리인들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박정희 유신헌법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방식이라면 전두환 신군부 헌법은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대통령을 뽑습니다. 문제는 총선거인단 5,277명 중에 민정당 소속이 3,675명이었고 무소속 1,123명도 대부분 전두환을 지지했다는 점입니다. (1981년 12대 대통령 선거 기준)

[현대사] - 박근혜의 경선룰과 체육관 대통령 박정희

전두환이 밝힌 '4.13 호헌조치'는 말 그대로 기존 헌법에 따라 체육관 선거를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럴 경우, 당연히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당선될 확률이 90% 이상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면 당선될 후보라서 그런지, 1987년 6월 10일 MBC 뉴스데스크는 노태우 후보에 대한 영상을 대통령 당선인급으로 보도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는 어떤 사람인가]
● 나레이션: 국민은 신뢰를 먹고 삽니다. 따라서 정치인은 국민의 신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안정은 기초며 바탕입니다. 이 바탕위에서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안정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갈등은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대화하는 자, 타협하는 자는 비겁자가 아닙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은사 및 동창들의 이야기]
● 앵커: 부드러움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 참을성이 많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경청하는 사람 또는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 이런 얘기들을 지금 많이 합니다만 노 후보와 오랜 시절을 함께 보낸 은사, 동창 등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서 한 번 보죠.

[대구시 신용동, 노태우 후보의 생가]
● 기자: 대구시 동구 신용동 596번지, 이 집이 바로 민정당 노태우 차기 대통령 후보가 태어난 생가입니다.
통일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수도장으로 알려진 팔공산 기슭에 자리 잡은 노 대표의 생가인 신용동 마을은 여느 산촌과 마찬가지로 집 앞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녹음이 우거져 있습니다.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인물을 가리켜 '신뢰'를 말합니다. 상관을 총칼로 위협했던 자를 '부드러움'을 갖춘 사람이라고 합니다.

찬양과 칭찬을 하다가 이제 통일신라 시대 김유신 장군을 끌어다가 위인전에 나오는 영웅으로 둔갑시킵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은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에 열린 시위 도중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사경을 헤맵니다.

젊은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목숨이 위태로운데도 MBC 정병수 해설위원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의 수립'이라 칭찬하며, 이는 '민주주의 발전의 요체라고 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신념과 의지가 실천된 것이다'라며 군부독재자 전두환을 찬양했습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갈 이 땅의 젊은이를 보호해야 할 경찰이 오히려 죽음으로 몰고 갔는데도 전두환과 노태우는 샴페인을 마시며 손뼉을 치고 축하를 하고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수십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우리의 소원은 민주'라는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더는 대한민국의 아까운 젊은이들이 물고문과 최루탄에 맞아 죽지 않게 만들겠다며 그들은 잔인한 경찰의 진압봉과 최루탄에 맞섰습니다.

6.10을 민주항쟁이라 부릅니다. 4.19혁명처럼 혁명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를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6월 항쟁을 혁명이라 부르지 못하고, 절반의 승리가 된 까닭이 분열과 기회주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국민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수구언론이 그들 세력을 대변하는 막강한 권력으로 다시 등장하도록 허용했습니다.

무능과 부정부패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군사독재의 잔재들이 역사를 되돌리려 하고 있는데도 민주세력은 패배주의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 전문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던 6.10민주항쟁 기념사를 2014년에 들어도 시대적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여전히 6월 항쟁이 절반의 승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완수해야 할 역사의 부채가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의 부채를 26년 만에 갚을 준비가 됐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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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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