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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원순,서울시장 출마 배경의 가장 큰 주역은?



안철수 교수와 서울시장 단일화에 성공한 박원순 변호사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치권보다는 참여연대나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처럼 시민 운동 쪽에 더 많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 출마의 뜻을 내비치자 과연 그가 서울시장감으로 적합한 인물인가? 라는 의구심이 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은 그가 살아온 인생과 도대체 그가 왜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했는지, 그 배경과 삶을 알아 보겠습니다.

■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그의 인생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원순 변호사는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중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시국사건인 '오둘둘 사건'에 연루되어 제적 당하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다시 입학합니다. 그 후 법원 사무관과 등기소 소장을 거쳐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대구지방경찰청 검사로 재직하게 됩니다.

박원순 변호사의 현재 공식 직함은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민운동가 이전에 인권변호사로 대한민국의 굵직한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인권변호사입니다. 박원순 변호사는 검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인권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변호사로 그가 맡은 사건을 보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박종철 고문치사, 미문화원 점거,서울대 우교조 성희롱 사건 등 군부독재 시절의 공안 사건과 약자를 위한 변론을 주로 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를 좌파로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가 공안사건의 변호를 맡았다는 이유인데,지금 돌이켜보면 그들이 말하는 공안사건은 정권이 조작한 날조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시기에 박 변호사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법을 무시하고, 국민을 탄압하며 나라를 무법천지로 만드는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 대안 있는 '시민운동'을 통해 한국을 변화시키다.

이제는 국민 대다수가 아는 '참여연대'라는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영국과 하버드 법대에서 공부하고 돌아 온 박원순 변호사는 '참여연대'창립 멤버로 1996년부터 6년간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박 변호사는 '참여연대'에서 일하면서 시민운동이 그저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권의 문제점을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을 통해서 사회 전반에 새롭게 변화된 사건들이 있습니다.


1997년 3월 삼성전자가 이건희 그룹 회장의 아들 재용씨와 삼성물산에 각각 450억 원, 150억 원어치의 사모전환사채를 발행하면서 시작된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은 단 한 주의 주식이라도 주주대표 소송이 가능한 미국과 일본과 다른 한국의 기업의 부조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을 통해 한국 재벌들이 기업을 자신들 마음대로 이윤을 챙기는 행위를 차단하는 작은 방어막이 되었고, 기업과 사주들의 경영 부패를 막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지금은 총선 때마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낙천.낙선 운동'도 참여연대가 주축이 되어 시작한 운동입니다. '총선시민연대'가 공천반대자 명단을 발표했을 때 정치권은 요동 쳤고, 잘못된 운동이라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낙천,낙선 운동'은 시민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자 헌법에 보장된 권리였습니다.

박원순 변호사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국가를 상대로 제기된 소송은 잘못된 국가의 행정을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바꿈으로 국민의 권리를 찾을 수 있게 한 대안 있는 시민운동이었습니다.



■ '아름다운 가게' 희망과 참여를 말하다.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했던 '아름다운 가게'는 가정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기부받아 그 제품을 수리하고 리폼하여 판매하고, 그 수익을 소외계층에게 나누어주는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을 통해 자원의 재활용을 물론이고, 간단한 참여를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 봉사를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런 활동은 단순한 기부가 아닌 시민이 참여하여 친환경과 나눔의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대안 있는 시민운동, 참여하는 시민운동의 붐을 만들게 됩니다.

■ 박원순을 '절망'과 '탄압'으로 몰아넣은 MB 정권

대부분 시민단체는 정부로부터 활동에 대한 지원금을 받습니다. '자활 복지프로그램','저소득층 자립 프로젝트','저소득층 자녀 도우미 서비스' 등 프로젝트별로 소요되는 예산과 경비를 일부 정부 복지 사업 형태로 지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민단체에 대한 후원은 MB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조리 반 토막 내지는 지원금이 막혀버리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시민단체 돌아갈 지원금이 어용단체에 지급됨으로 실제 정부가 하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국민을 위한 활동이 위축되거나 포기하게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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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게'를 통해 나눔과 기부 운동을 전개했던 박원순 변호사는 '희망제작소'를 운영하며 지역 시민운동을 계몽시키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농어촌의 자립이나 청년 실업을 해결하려는 '희망 별동대','사회혁신 센터' 등을 통해 시민들 스스로 자생력을 높일 수 있도록 멘토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자신을 '소셜 디자이너' (Social Designer)라고 부르며 정치권의 숱한 러브콜에도 시민운동을 통해 나라를 변화시키겠다는 박원순의 생각은 국정원의 사찰과 압력으로 바뀌게 됩니다.


희망제작소가 행안부와 맺은 3년 계약이 1년 만에 해지되고, 하나은행과의 후원사업이 무산되는데, 이 배경에는 국정원이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국정원이 제기한 소송에서 박원순이 승소했습니다. 박원순은 이때부터 정치권력이 얼마나 지독할 수 있는지 깨닫고 시민운동가에서 정치가로 변신을 결심하게 됩니다.

"우리 법률은 어떤 형태의 사찰도 금지하고 있고 그것을 처벌하고 있다,처벌받아야 할 사람이 그것을 문제 삼은 사람을 벌하는 것이 우리가 뽑은 정부의 할 일인가"

박원순 변호사는 군부독재 시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정치활동을 이명박 정권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명백히 군부독재 시절만큼 후퇴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행과 시민운동조차 사찰당하는 정권에서의 시민운동은 공허한 울림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주권을 위임받은 정치가들이 국민의 뜻을 거역할 때, 혹은 정치권이 나라를 위해서 담당해야 할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할 때 저희는 국민의 이름으로 언제든지 정치가들을 심판할 수 있는 합헌적 권리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정치가를 심판할 수 있는 시민의 작은 운동이 '낙천,낙선'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조금이나마 정치를 개혁시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대통령 한 명 잘못 뽑아 대한민국은 암흑의 시대로 돌아갔고, 박원순은 이 암흑의 시기를 평화롭게 만들고자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뛰어 든 것입니다.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에 출마했다고 쉽게 당선되거나 서울시장직을 무난히 수행하기는 걸림돌이 많습니다.( 이 부분은 내일 포스팅 예정) 그러나 그의 서울시장 출마를 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사람들을 투사로 만들고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주 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철수나 박원순처럼 가만히 놔두면 자신의 일만 열심히 할 사람들이 정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죽이려고 목을 졸라대니 살고자 의를 가슴에 품은 인물들이 발버둥치며 나오고 있습니다.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주역은, 주위 사람이나 시민단체,야권이 아니라 바로 이 나라를 흑암 속으로 넣고 국민을 괴롭히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