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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일본문화/일본사회

일본의 야쿠자

야   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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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쿠자의 의미
  야쿠자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온 몸에 문신을 하고 파마 머리에 새끼손가락을 절단한 범죄자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손에 가지고 있는 카드 3枚의 합이 10이나 20이 될 경우 무득점이 되는 "三枚" 라는 도박게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무득점의 조합을 "8(야 = 八, や), 9(쿠 = 九, く), 3(자 = 三, さ)" 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의미가 전도되어, 도움이 안 되는 것, 가치가 없는 것을 의미하게 되고, 점차 노는 사람이나 폭력배 등을 지칭하게 되었다.

 

2. 야쿠자의 역사
  초기 야쿠자는 1700년대 중반부터 말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 집단의 소속원들은 Babuk(전통적인 노름꾼)와 Tekiya(거리의 한량)에 속했다.  Bakuto가 거의 고속도로와 도시주변에 모여 살았고, Tekiya 가 일본의 공진회와 시장에서 활동했던 것처럼, 그 집단은 문제점이 없는 작은 지역에 모여 살았다. 야쿠자는 가족집단으로 조직되기 시작했고 Oyabun-kobun(아버지의 역할 / 아들의 역할)로 알려진 관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충고, 보호, 그리고 도움을 제공하며 Oyabun은 아버지의 역할 을 담당했고 Kobun은 Oyabun이 필요로 할 때마다 절대적인 충성과 봉사를 맹세하며 아들의 역할을 담당했다.

 

Kabuki-者(Mono)
  야쿠자의 기원은 16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때에 Kabuki-者("미친 사람들")로서 알려 져 있던 그들은 지역관리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들의 이상한 옷차림과 머리모양 그리고 행 동거지는, 그들의 옆에 찬 긴 칼과 함께, 그들을 상당히 유명하게 만들었다. Kabuki-mono는 습관 적으로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는 어떤 누구라도 그냥 놔두지 않았고 심지어 단순한 쾌락을 위해 칼로 베어 죽이기까지 했다. Kabuki-mono는 괴팍한 사무라이들이었으며, 그들의 무리를 나타내는 험악한 이름을 사용했으며 심한 욕지거리를 내뱉곤했다. 서로간의 의리는 목숨과도 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가족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떠한 위협으로부터도 서로를 보호하려 했다.

 

Tekiya(일만 잘되면 한 밑천 잡는 자)
  Tekiya의 역사는 여전히 여러곳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가장 넓게 알려진 이론은 Tekiya가 일찍이 행상인이라는 의미로 쓰여졌던 yashi로 부터 왔다는 것이다. yashi는 모든 상인들과 장돌뱅이를 위한 잡상인이었다. 그들은 도쿠가와정권으로부터 상호간의 이익과 보호를 위해 단합했다. 그들은 공진회와 시장에 있는 노점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품의 재료와 품질에 대해서 속였다. 그들은 취한 듯이 행동했고 또한 제품을 싸게 파는 척 했다.
Tekiya는 야쿠자의 조직을 답습했다.(oyabun, 중간 관리, 하급관리, 그리고 견습생들) Oyabun 은 Kobun과 상품의 유용도에 따라 상품진열대의 할당량을 조절했다. 그들은 또한 자리세와 보호 를 명목으로 돈을 거뒀고 그 두 세금의 차액을 착복했다. 그들이 했던 모든 일들은 합법적인 것 이었다. 1700년대 중반에, 봉건주의적 당국 관계자들은 Tekiya를 인정했고 그들의 권력을 한층 높여 주었다. Oyabun은 또 하나의 이명을 가지면서 감독관의 권위를 받았고, 넓게 펴지 사기로 인한 영토분쟁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 사무라이와 비슷한 종류의 칼을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Tekiya는 보호료를 받는것, 범죄자와 도망자를 숨겨주는 행위, 그리고 다른 Tekiya나 갱과 싸우 는 등 범죄적인 성격을 띄었다.


Bakuto --- 노름꾼
  Bakuto는 도쿠가와시대에 처음으로 알려졌는데 그 당시 정부는 노동자들이 받았던 임금의 일부분을 되얻기 위해서 관개일을 하는 노동자들과 노름하도록 그들을 고용되었다. Bakuto는 야쿠자의 전통적인 "손 짜르기"관습과 "야쿠자"라는 용어의 기원뿐만 아니라 노름에 관한 일본의 전통에 기여했다. Yubitsume, 손 짜르기 관습은 Bakuto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 손의 무력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새끼 손가락의 끝마디를 의식에 따라 절단한다. 이것은 노름꾼이 그의 칼을 꽉 질 수 없음을 의 미했다. Yubitsume는 Oyabun에 대한 사과의 행동으로서 행해졌다. 큰 죄를 지었을 때는 또 다른 마디나 다른 손가락의 마디를 절단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또한 추방당하기 전까지 계속되는 처벌의 방법으로 사용되어졌다. 문신의 사용 또한 Bakuto의 범죄적 관습으로부터 왔다. 범죄자들은 그들이 저질렀던 범죄를 위해 사용했던 무기에 있는 검은 반지로 주로 문신을 하곤 했다. 그러나, 문신은 곧 힘을 시험하 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등문신은 100시간의 고통을 참아내야만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신은 항상 사회에 그들 자신을 적응시키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일탈자의 표시였다.

 

야쿠자의 근대화
-부흥의 시기
  1867년에 시작된 메이지 유신때 급격하게 변화하는 일본의 흐름에 동행해서 야쿠자 또한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건설현 장과 하역장으로부터 회원들을 모집했다. 그들은 심지어 인력거 사업에까지 관여했다. 그러나, 경찰이 Bakuto갱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 있었기 때문에 도박사업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Bakuto와는 다르게 Tekiya는 번영하고 점점 더 확대되어 나갔다. 왜냐하면 그들의 활동은 적어도 겉으로는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쿠자는 몇몇 정치가들과 관료들의 편을 들면서 정치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와 협력했고 그래서 공식적인 허가를 얻거나 적어도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정부는 야쿠자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민주주의로의 일본의 전환에 있어서 군사적인 역할을 담당했 던 국수주의자를 위한 도움 등. 여러 비밀단체들이 생겨났고 언어와 암살 그리고 협박편지에 대 해서 훈련받았고, 군사적으로도 훈련받았다. 두번의 쿠테타, 두 총리와 두 재무장관의 암살 그리 고 계속되었던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에 대한 공격 등 국수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한 영향력은 1930 년까지 계속해서 지속되었다. 야쿠자는 그 명분에 대한 물리력과 사람들을 동원했고 점령된 Manchuria와 중국에서의 "토지개발계획"에 참여했다.

 

-미군정기
Gurentai는 점령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때 정부에서는 권력의 숙청작업이 일어나고 있었고 점령군들은 정부와 기업에 있는 최고 권력층들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Gurentai는 마피아의 일본적인 형태로서 보여질 수 있다. 그 두목은 마피아의 Al Capone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암시장에서 거래를 했고 그들의 활동을 위해 위협과 강요 그리고 폭력을 사용하기까지 했다. 실업자나 망명자들이 그 조직을 이루었다. 비록 범죄자로 체포될지 라도 정부는 한국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Gurentai를 고용했다.
점령군은 곧 야쿠자가 강력한 조직체이고 익명의 정부고급관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두 Oyabun아래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미군정은 그들이 야쿠자로부터 일본일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1950년 그들의 패배를 인정하게 됐다.
전후시대에 야쿠자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더욱 폭력화되었다. 칼은 과거의 유산이 되었고 총이 새로운 무기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강도질과 갈취의 대상은 다른 행상이나 노름꾼 그리고 특별한 집단만이 아니었다. 점점 보통시민들도 그들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영화 갱단들 모습에서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모습 또한 달라졌다. 그들은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고 검은 양복과 검은 넥타이 그리고 하얀 셔츠를 입었으며 머리를 짧게 자르기 시작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 야쿠자의 조직원들은 150%이상 늘어나서 일본의 정규군보다 많은 184,000명이 됐다. 일본전역에서 활동하는 갱조직은 약 5000개나 됐다. 야쿠자는 자신들만의 영역 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들간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폭력을 동반한 혈전이 시작되었다.

 


3. 야쿠자와 정치계의 관계
1960년대 안보 투쟁 시대의 좌익 운동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일본 전국의 대학생, 노동자, 당원들의 거센 시위를 경찰 혼자 봉쇄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발급된 티켓은 야쿠자들을 동원한다는 아이디어였고, 이미 야쿠자의 정치적 동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민비 시해사건 역시 일본 우익 야쿠자들의 소행이었던바 원래부터 야쿠자란 일본의 국수 우익주의자들의 오른팔격인 행동대로서 규모가 방대해져 왔다.
안보 투쟁 때의 야쿠자 행동대는 그 맡은 임무를 충실하게 해냈다. 그들은 애국을 내세웠다. 이 나라를 폭력 혁명 공산당들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정신으로 그들 역시 거침없는 폭력을 휘둘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러한 정치적 과도기가 지났을 때 야쿠자들은 이미 경찰 통제력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커져 있었던 것이다.
과도기의 시대에 정부 특히 우익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특혜를 베풀었다. 야쿠자는 이미 밤의 세계를 지배하고 검은 경제의 극대화 작업에 돌입해 있었던 거다. 경찰의 통치만으로는 안 되니까 너희들이 어느 지역을 관할 통제하라는 것이다.
'긴자의 밤은 내가 다스린다. 대신 여기서 무슨 사고가 나면 내가 책임진다' 이런 식의 논리가 일본 전국 각지에 적용되면서 경찰과 야쿠자의 공존 논리도 성립되었다. 물론 세인들이나 매스컴의 눈이 있으니깐 가끔씩 단속을 한다. 단속을 하는 날은 당연히 야쿠자들 사무실에 연락을 해준다. 야쿠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기류, 마약류, 불법 물건, 장부들을 숨긴다. 막상 경찰이 왔을 땐 그들의 체면도 세워주기 위해 한두 자루 정도의 총이나 일본도 등을 남겨둔다. 경찰에도 건수를 올려주어야 피차 공생한다는 생각이다. 야쿠자는 폭력단이 아니라는 구호는 바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겨난 의식이다.
이러한 공생관계 탓에 일본 정부의 야쿠자 타도는 이미 시기가 지났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불법적인 조무래기들은 잡을지 모르지만 거물들은 이미 모두가 합법적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대해 오랫동안 내려온 정치계와의 끈이 있다. 상식적으로 수상이 야쿠자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실정이었다면 다른 수많은 정치가들은 어떠했겠는가. 실제로 수많은 의원들은 선거 기간 동안 야쿠자에게 선거 운동을 부탁해 왔고 자금 지원을 받아 당선된 숫자도 부지기수다. 한 마디로 일본 야쿠자는 타도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일본 최대의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조는 전체 폭력단의 약 40%를 차지하여 20만 명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면으로 미국 마피아를 훨씬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조직이다. 일본 야쿠자의 전부를 알려면 야마구치 조직의 줄기를 알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대 고베에서 처음 조직된 야마구치조는 일찌기 오사카 일대를 포함하는 간사이지방을 제패, 그 여세를 몰아 규슈, 시고쿠, 홋카이도지역에까지 문어발처럼 세력을 뻗었다. 최근에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방에도 거점을 마련했다. 몇 년 전부터 도쿄진출을 노려온 이들은 도쿄 일원에 이미 1백여 개의 사무실을 갖고 있다. 당연히 기존 세력들과의 마찰이 빚어졌고 그 영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야쿠자들에게 있어서 도쿄를 점령한다는 것은 거대한 규모의 유흥가를 손에 넣는 것 외에도 전국제패라는 자존심이 걸린 과제였다.  이미 야마구치 조직은 일본 전국을 석권한 최고 최대의 조직이 되어 있다. 실제로 야마구치 조직의 역사는 다른 조직과의 세력다툼으로 벌어진 살인과 이에 대한 보복 살인 등 항쟁과 대립의 역사이다.
 야마구치 조직이란 것이 야마구치 노보루라는 초창기 오야붕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당시는 고베의 조그만 깡패 조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야마구치 조직을 떠오르는 태양으로 만든 다오카 가쓰오라는 인물이 가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다오카가 3대째의 두목이 된 후 야마구치 조직의 세력확장 수법에는 공통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한 개의 도시로 진출할 때 기존 야쿠자 조직과 마찰을 하게 되고 표면적으로는 야마구치 조직원이 먼저 습격을 받거나 살해된다. 야마구치 조직의 본부 타격대는 이러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량의 조직원들을 동원, 전격적으로 지방 조직을 괴멸시켜 버린다. 일본의 언론들은 이를 야쿠자들끼리의 항쟁이라고 표현한다. '피로 피를 씻는다' 즉 상대방의 피로 자신들이 흘린 피의 복수를 하는 것, 이것이 야쿠자의 항쟁이다.


▶ 일화
♧오사카 전쟁
  수도권 진출을 성취한 야마구치 조직은 이제 거의 일본 전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조직으로 커졌다. 그런데 1975년 야마구치 조직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오사카에 기생하고 있던 한 작은 야쿠자 조직이 야마구치에게 반기를 들고 달려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마츠다 구미 항쟁사건으로 알려진 야쿠자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말한다. 이 사건은 그 후 3년 4개월에 걸쳐 계속된 3차례의 유명한 오사카 전쟁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이 항쟁사건에 대해 당시 매스컴들은 야마구치 조직을 코끼리로 봤고 마츠다 조직은 한주먹꺼리도 안되는 모기에 비유했다.


▶ 오늘날의 야마구치구미
일본은 1992년 '폭력단원에 의한 불법행위의 방지 등에 관한 법률'로서 일명 '폭력단 신법'을 발효하였는데, 전국의 폭력단 조직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한편 야마구치 조직은 야쿠자 조직은 중소 폭력단을 흡수하면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야쿠자 전체의 연간 수입은 7조 엔에서 많을 때는 9조 엔을 넘나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폭력단원 한 명이 벌어들이는 금액으로 계산하면 1인당 연간 평균 7천 400만 엔의 매상을 올리는 셈이 된다.
그들이 벌이는 사업도 총회꾼이나 해결사의 역할을 하는 소위 '민사 개입 폭력'이나 마약 밀매, 도박 사업 등의 활동 이외에 지금은 건설, 운수, 항만하역, 금융 계통으로 사업을 확대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최근에는 흥행사업으로도 영역을 넓혀 스모, 프로레슬링, 경마 등 프로덕션을 경영하며 연예계까지 그 손길을 뻗치고 있다
야쿠자는 지금도 지진과 같은 재변이 일어나면 조직원들을 동원해 수습과 봉사에 나서는 등 국민의 지지 기반을 쌓으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현대의 사무라이로서 언제까지나 국민의 영웅으로 남고 싶은 자구적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주요인물
다오카 카즈오( 1912. 3. 28 일본 산쇼무라[三庄村]~1981. 7. 30 아마가사키[尼崎])
 일본의 야마구치구미의 우두머리(오야분[親分]). 별칭은 구마[熊].
 일본 전국에 10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최고의 야쿠자 두목으로 활약했던 다오카 가쓰오는 다른 조직의 두목들과는 달리 탁월한 사업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보통 야쿠자들이 돈벌이 활동으로 수입을 챙기는 보호 명목비나 도박사업 등을 탈피해 건설, 운수, 항만하역, 금융 계통으로 사업을 확대해서 재정적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그 후 흥행사업에도 영역을 넓혀 스모, 프로레슬링, 경마 등 프로덕션을 경영하며 연예계까지 휘어잡았다.
 거대 야쿠자 조직의 최고 두목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통솔력, 임기응변, 조직력, 인간관계, 자금력, 전투성, 근성, 예감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 같은 조건에다 부수적으로 차별과 빈곤의 설움 속에 밑바닥 인생을 살아본 경험을 가진 두목이 야쿠자 사회에서는 더욱 강한 조직을 구축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사회적 모순의 추악함을 체험하며 쓴맛 단맛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오카 가쓰오 두목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23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7살이 됐을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친척집에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조선소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불량 소년들의 무리와 어울리게 됐고 회사직원들과 패싸움을 벌인 후 직장을 뛰쳐나온다.
 17살의 다오카는 당시 군소 조직이었던 야마구치조직의 제2대 오야붕 야마구치 노보루의 눈에 들었고 선원노동쟁의의 해결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정식으로 조직원이 된다. 7년 후 어느 겨울날 야마구치 조직 사무실을 급습한 경쟁 야쿠자 조직의 행동대원을 칼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감방에서 7년을 보낸다. 출옥 후 이 사건은 조직 내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그 영향으로 1946년 간부들의 추대로 제3대 두목의 자리에 앉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버젓이 기업의 탈을 쓰고 각종 이권사업에 나섰던 이 조직도 잠재된 폭력성 등의 속성으로 일단 경쟁 조직이 먹이를 건드리면 굶주린 이리떼처럼 털을 곤두세운다. 다오카의 잔인한 전략 전술은 조직간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발생하면 빛을 발했고 그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 졌다.

 

5. 한국 조폭과 비교
 야쿠자는 한국의 조폭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한국의 조폭은 과거의 '건달' 내지는 '깡패'들이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좀 더 조직화되었고, 해방 이후 극도의 정치적 혼란기에서 소위 '정치 깡패'로 동원되었다가, 오늘에 와서 유흥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조직이라든지, 계보, 규칙 등이 상당히 비슷하고, 검은 돈을 주 수입원으로 하고 있는 등 어찌 보면 조폭이 야쿠자의 모습을 상당부분 모방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자세히 보면 야쿠자와 조폭은 다른 면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규모와 경제력
일본의 야쿠자는 그 영향력이나 규모가 한국의 조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일본의 야쿠자는 거의 경찰의 통제력 밖에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향럭이 막대하다. 또한 그들의 경제적 규모는 세계 웬만한 국가들의 GNP를 훨씬 넘어선다. 예전에 야쿠자 부인들 수십 명이 토크쇼에 출연해서 솔직하게 그들의 경제 실상을 얘기한 일이 있는데, 그들의 월 소득은 2천만 원 이상이고 거의가 벤츠를 타고 있었다. 야쿠자의 부인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엔 사회적 눈초리 때문에 가끔씩 곤혹스럽지만 후회는 없다고 얘기했다.
또한 모두들 남편 쪽에 생명 보험을 걸어놓고 있는데, 남편이 생명을 잃을 경우는 20억 원 이상의 보험금을 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살아 있으면 한 달에 2천만 원, 죽으면 20억원, 어쨌든 이 정도의 경제 상황이니 야쿠자의 사업 규모는 가히 상상이 간다. 10만 명이라는 대식구와 그 위에 상부 구조의 자금 능력은 일본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반면 한국의 조폭은 자금력이나 그 영향력에서 야쿠자와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폭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통제력 하에 있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민심을 얻기 위한 첫 조치로 '국토건설단' 이라는 미명 하에 1960년 깡패 소탕령을 내렸고, 이후 역대 정권은 10년 단위로 폭력배와 전쟁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72년 유신을 전후한 '사회악 처단 조치', 80년 계엄체제 아래 실시된 '삼청 제5호', 그리고 89-90년, 90-92년에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6공화국의 '범죄와의 전쟁' 등이 그런 예이다. 정치적으로 동원된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야쿠자의 경우는 오히려 정치와 결탁하고 '동업'한 결과가 되었고, 한국의 조폭은 정치 세력에 '이용'되었을 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그들이 주요 경제원으로 삼고 있는 사업들도 '검은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웬만한 나라의 GNP를 능가할 정도의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는 야쿠자와 조폭은 사뭇 다르다. 사업 내용 역시 경찰의 힘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야쿠자들은 매춘, 마약 사업 등을 벌이는 것도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지만, 한국의 경우 아직은 드러내놓고 이러한 사업에 개입하지는 못하고, 개입하더라도 미미한 수준이며, 주로 유흥가를 중심으로 한 이권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운영방식
한국 조폭들의 이권개입 방식이 전통적인 방식과는「질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일본 야쿠자식의 「기업형 운영방식」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다는 보도도 최근 있었다. 최근 들어 한국의 조폭들도 이런 기업형 운영방식을 이용하고 있으나 정도의 차이에 있어 아직은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한국의 경우는 이러한 조폭의 움직임에 대해 대검 강력부는 곧 조폭들의 자금원으로 밝혀 진 유흥업소 371개, 건설업체 18개, 판매업소 17개 등 423개 업소에 대해 일제 수사에 나서는 등 본격 「조폭 사냥」에 나섰다. 일본의 경우와는 다른 대처 방법이다. 물론 점차 기업화․국제화되고 있는 조폭들에게 이러한 법의 통제가 언제까지 통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아직은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본다.

 

♧국민들의 인식
물론 야쿠자와 조폭은 그 나라애 있어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조폭세계와 관련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유흥업에 종사한다든지 여타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경우가 아닌 일반 시민이라면, 그저 '나쁜 깡패들' 정도의 의미일 뿐 조폭 세계를 접하고 더더구나 그에 의해 피해를 볼일은 없다. 그러나 야쿠자는 그 조직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시민들도 그들에 의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 경찰도 그들의 눈치를 보는데 하물며 일반 시민들은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앞의 예처럼 수상이 야쿠자들에게 경호를 부탁한 적도 있다. 즉, 한국의 경우는 두려워하되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일본의 경우는 '경외'하는 느낌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가족 중 조폭이 있다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질 뿐, 일본의 야쿠자 마누라들이 그렇듯 '내 남편이 야쿠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경호를 조폭에게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6. 일본의 대책
오사카 전쟁과 규슈 전쟁이라는 조직간의 치열한 항쟁 기간동안 일반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 등 무법천지와 같은 야쿠자들의 행위에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경찰은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1991년 일본 경찰은 '폭력단원에 의한 불법행위방지 등에 관한 법률' 일명 '폭력단 신법'으로 불리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이 법률은 야쿠자들에 대해 일본경찰이 제시한 일종의 선전포고문이었다. 일본 국회에서 이례적으로 집권 자민당에서부터 그동안 사사건건 반대해 왔던 공산당을 포함해 모든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법률이었다.
 경찰은 △조직원 중 살인 등 전과자수가 일정비율 이상일 경우 △조직원이 조직의 힘을 이용, 부정하게 돈을 벌 경우 △두목이 폭력 등의 수법으로 조직을 계층적으로 통제할 경우 등 3개항을 설정하고 이를 모두 충족시키는 조직에 대해서는 '지정 폭력단'으로 정하고 특별관리에 들어갔다.
 현재 일본 국가공안위원회에 의한 '지정 폭력단'은 오사카의 야마구치조직, 도쿄의 이나가와가이, 도쿄의 스미요시가이, 도쿄의 교쿠도가이등 25개 조직에 이른다.
 이렇게 되자 이들 지정 폭력단의 야쿠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고문 변호사를 통해 폭력단 신법을 피하기 위한 강습회를 여는 등 대책을 강구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또 다른 대응책으로 공개적으로 항변하는 행동을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야쿠자 부인들이 반대 시위행진이라는 웃기는 진풍경을 보여주기도 했다. '폭력단은 야쿠자와 다르다'며 이 법률의 시행을 반대한다는 피킷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자기들은 야쿠자이지 폭력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법령은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또한 이들은 '2차 대전 직후 혼란기에 야쿠자가 치안유지에 기여했고 좌익과 제3국인(조선인) 폭동에 대비한 요인 경호까지 맡았으며 그 후에도 선거 철이면 우리를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막대한 예산과 여론의 지지에 힘을 얻어 이 법률의 명칭을 ' 폭력단 대책법'으로 부르며 야쿠자와의 전쟁을 단행했다. 이렇게 되자 일부 야쿠자 단체들은 표면적으로만 우익단체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크고 작은 우익단체가 약 1천여 개에 이른다.
 또 한가지 야쿠자들의 대응은 기존 조직을 합법적인 기업체로 가장하는 것이었다. 두목들은 모두가 사장으로 변신했다. 이들은 폭력단 신법에 대한 각 조문별 대응 방안이 기재된 지침서를 만들어 조직원들에게 배부하기도 했다.
 또한 자금을 벌어들이기 위해 영역을 증권업계의 나스닥시장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 야쿠자 관련기업이 주식을 공개하거나 상장된 벤처기업 등에 대해 약점을 잡고 부당한 요구를 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오사카에서 '증권시장 폭력단 배제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이 위원회는 경찰과 증권업계가 협력해서 증시로부터 야쿠자를 몰아내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고 상시 감독하기 위해 일본전국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오사카지역 폭력단 추방센터가 개설한 홈페이지(www .mydome.or.jp/boutsui/) 를 통해 이들의 활동을 보면 야쿠자들의 접근에 대응하는 요령을 각 직업별로 분류 소개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문답 편에는 야쿠자가 되면 하루종일 사무실에서 청소와 취사당번이나 두목  출타 시 보디가드 등의 업무로 거의 자유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야쿠자들 중에는 마약중독자가 많으며 야쿠자 단체 가입을 권유하는 유혹에 청소년들이 넘어가지 않도록 대응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야쿠자 조직에서 빠져 나오려 해도 손가락을 자르는 등의 제재가 두려워 쉽게 손을 씻지 못하는 청소년을 위해 폭력추방센터와 상의하면 두목에게 '중지명령'을 보내 탈퇴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 또한 야쿠자에 대한 소송비용을 무이자로 빌려주기도 하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는 위로금도 지급하고 있다.

 

 

출처:신홍휴,박  현,허선미님이 작성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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