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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하숙집에 전역 기념 공원까지, '박정희 신격화'의 실체



강원도 철원군 군탄리에는 '군탄 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은 1963년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이 열린 곳으로 1969년 육군 5군단이 기념비를 세웠고, 이어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1976년 강원도가 기념비 주변에 무려 6910평의 공원을 조성해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이라고 명명했었습니다.


박정희 사망 후,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은 '군탄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자, 철원군은 지난 26일 '군탄공원'을 다시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으로 최종 확정하였습니다.

전역기념비까지는 이해를 하겠지만 (이마저도 어이없지만) 그 일대에 수십억 원의 돈을 들여 7천평에 가까운 공원을 만들고, 공원이름을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이라고 부르며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박정희를 신격화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대한민국이 제대로 역사를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 불행한 군인?이라는 전역사에 담긴 진실'

박정희는 1963년 8월 30일 육군 7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치릅니다. 이때 박정희의 나이 만 46세, 지금으로 보면 대령을 달 나이에 박정희는 육군 대장으로 전역식을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정희와 함께 5.16쿠데타를 주도한 김종필은 1962년 3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막습니다. 그리고 구 정치인 가운데 쿠데타를 지지하는 인물과 쿠데타 세력을 합쳐 '재건동지회'를 창설 '민주공화당'을 창당합니다. 그리고 1963년 5월 27일 박정희 대장을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을 1면에 보도한 신문들. 출처:경향신문


박정희가 전역식에서 말했던 "다시는 이 나라에서 본인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라는 문구는 당시 유행어처럼 번지며, 박정희 이미지 홍보에 도움이 됐습니다. 이 연설문을 박정희 본인이 직접 쓴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 연설문은 박정희의 비서관이었던 동훈이라는 사람이 작성한 것입니다.

동훈 비서관이 썼던 문구는 '본인과 같은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였습니다. 동훈 비서관은 '군대가 탱크를 몰고 나오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썼지만, 쿠데타 세력에게는 부득이한 쿠데타였다는 의미가 됐습니다.

나중에 이후락 공보실장이 추가가 '불운한'이라는 뜻은 군인이 목표로 삼는 전투에서 전사하지 못하고, 참모총장이 되지 못하고 전역하는 뜻으로도 해석됐다고 동훈 비서관은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 전역식 도중에 눈물을 흘리는 박정희. 출처:동아일보


'불운한'이라는 것은 운명이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본인 스스로 참다운 군인의 길을 가지 않고 정치군인이 됐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 전역을 하는 사람인데 무엇이 그리 불행했겠습니까? 그저 비서관이 쓴 글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쿠데타를 일으킨 불쌍한 군인'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탱크를 몰고 대한민국을 장악해 법을 뜯어고치고 정치인을 탄압한 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만 46세의 나이로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는 쿠데타 군인의 전역식을 기념하는 공원의 역사를 '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에 오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알까요? 그저 박근혜 대통령 아버지 박정희가 참군인이었다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 술 취한 군인이 벌인 쿠데타'

지금은 문래공원으로 바뀐 6관구 사령부 자리에는 박정희의 흉상이 있습니다. 문래공원에 있는 박정희 흉상은 1966년 7월 7일 6관구 사령부 내에 세워졌고, 부대가 이전하면서 일반인에 공개됐습니다.

▲문래공원 내에 있는 박정희 흉상. 출처:오마이뉴스 ⓒ 이규정


이 흉상은 5.16쿠데타를 모의했던 장소였던 6관구 사령부 지하벙커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김재춘,김형욱 등은 6관구 사령부에 모여 쿠데타를 지휘했는데, 6관구 사령부는 수방사의 전신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임무를 띈 부대였습니다.

쿠데타 전날 박정희는 원래 밤 10시까지 6관구 사령부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쿠데타 모의 계획이 조금씩 누설되면서 헌병대가 6관구 사령부에 있고, 신당동 박정희 집에도 방첩대가 감시하자, 한웅진(육사 2기 동기생)이 자고 있던 청진동 여관으로 피신합니다.

여관에 있던 박정희는 술이나 마시자며 청진동 대폿집으로 향했고,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다 취한 상태로 6관구 사령부 지하벙커에 와서는 술 냄새를 풍기며 쿠데타군을 지휘(?)했습니다. 장도영은 이날 박정희와의 전화 통화에서 '도대체 저렇게 술에 취한 상태에서 무슨 혁명을'이라는 마음에 "글쎄,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쿠데타를 구국의 일념 어쩌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박정희 미화에 불과합니다. 박정희의 5.16이 성공한 쿠데타는 맞지만, 그 이면에는 오로지 자신의 출세를 위한 군부 파벌주의에서 비롯된 쿠데타일 뿐입니다.

이승만이 군을 동원한 정권 유지를 자행했고, 이런 상황에서 군부의 부패와 진급에 대한 불만이 넘쳐났습니다. 특히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는 진급에 대한 기회가 점점 없어졌고, 박정희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1961년 육군본부는 군 장성에 대한 인사 평가 작업을 벌이는데, 그중에 사상이 의심스러운 전력이나 근무평가가 나쁜 장성 수십 명이 예편 대상자로 정해지는데, 박정희도 포함, 그해 5월말이면 강제 예편될 예정이었습니다. 결국 박정희로서는 5월말 예편을 하기 않기 위해서는 쿠데타를 벌여야만 했습니다.


박정희가 이전부터 나라를 위해 쿠데타를 생각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짜 군인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하는 가를 보여준 사례가 있습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부산 정치 파동(임시 수도 부산에서 헌병대를 동원 국회의원을 연행하고 구속한 사건)을 일으켰는데 당시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종찬 장군은 이승만의 명령에 불복하고 결국 해임됩니다.

일본군 출신이지만 아버지의 친일 자작을 받지 않았던 이종찬은 일본군 출신들이 많이 따랐는데, 박정희도 그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이종찬을 찾아가 쿠데타를 제의합니다.

"각하, 군이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됩니다. 군사혁명으로 나라를 구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군이 정치에 개입하면 일본 군국주의처럼 나라를 망치는 거 몰라 그래? 대통령의 군 동원 명령에도 내 직을 걸고 반대한 건 그래서야."

이종찬 장군은 일본군이었지만 일본 군국주의가 얼마나 나라를 망치는지 알았고, 그런 이유로 박정희의 쿠데타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이후 박정희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숨어 있다가 진급이 동기보다 늦은 이용문을 찾아 쿠데타 모의를 했고, 이용문은 자신의 진급에 불만을 품고 박정희의 쿠데타 제의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만약 이용문이 그후 비행기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5.16 쿠데타의 주역은 박정희가 아니라 이용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의 본질과 배경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5.16 쿠데타는 자신의 진급과 군부 내 문제를 술에 취해 해결하려고 저질렀다는 사실을..

' 일본군으로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꿈을 가졌던 청운각'

경북 문경시는 박정희가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있었던 하숙집 청운각과 그 주변정비사업을 벌였습니다. 청운각을 정비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혀 죽을 지경입니다.

▲ 중앙일보 인터넷판에 올라온 청운각 관련 기사. 출처:중앙일보


중앙일보는 뉴시스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청운각을 '박정희 전 대통령 꿈의 산실'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문경초등학교 시절 그가 생각했던 꿈은 과연 무엇일까요?

당연히 군인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이었고, 그 당시 군인은 오직 천황폐하에 충성하는 일본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생각했던 꿈은 '일본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본 군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를 기념하는 사업을 세금을 들여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청운각에 있는 안내문과 문경보통학교 시절 박정희(좌측)


일본이 역사왜곡 한다고 하지만 한국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청운각에 소개된 박정희를 보면 천직으로 알았던 교직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만주군관학교에 갔다고 하지만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학교에는 알리지 않고 몰래 치렀습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본 시기는 1939년 10월 3일인데, 이때는 학기 중이라 박정희는 시험을 치르자마자 바로 다음 날 문경을 향해 떠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교사로 재직하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학기 중에 몰래 만주군관학교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자 교사 생활을 때려 치웠습니다.

청운각 안내문에는 '총칼을 차고 와서 (일본을)이겨주마'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이 말은 전혀 다릅니다.

"각하, 왜 만주로 가셨습니까? (김종신 청와대 비서관 )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박정희 대통령)

언론인으로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었던 김종신씨에 의하면 박정희의 만주행 이유는 '긴 칼 차고 싶어서'였습니다. 무슨 일본에 대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교사로 재직하면서 받았던 신분 상승의 욕망이 박정희를 만주군관학교에 혈서를 쓰고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즉 박정희는 긴 칼을 차고 일본을 무찌르기보다는 군인이 되어 문경 시내에서 자신을 무시했던 자들 앞에서 뽐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 문래공원에 있는 박정희 흉상, 5.16혁명 발상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출처:한겨레


술울 먹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는 결국 술 마시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박정희 흉상을 보는 저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사람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일본군이 되어 긴 칼 차고 성공의 아이콘으로 살겠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 살았던 하숙집을 세금으로 고쳐주고, 자신이 강제 예편될까 두려워 술 마시고 술 냄새 풍기며 쿠데타를 모의했던 곳에 흉상을 세우고, 총칼을 앞세워 대통령이 되려고 46세의 나이로 대장 예편을 했던 정치군인의 전역을 기념하는 공원을 세운 나라가 여러분이 사는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이엠피터'는 차마 우리 아이들에게 꺼내기조차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