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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박정희 어릴 때부터 친일파?



어떤 이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의 과거를 다시 살펴보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 과거 속에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그가 무엇을 꿈꾸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그 사람들의 일생을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박정희의 어린 시절을 통해 그를 바라보는 저만의 생각을 여러분께 말하고자 합니다.

혈서를 써서 일본 군인이 된 친일파, 조국 근대화의 대부, 독재자, 혁명가 등 다양한 시각으로 사람들은 박정희를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가 단신이면서 카리스마가 있었다는 점은 모두들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그 카리스마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  영웅의 카리스마 VS 폭력

박정희는 구미공립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영웅들이나 위인들의 어린시절을 기술하는 책들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처럼 박정희도 고향인 상모동에서 학교가 있던 구미면까지 매일 20리 길을 걸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9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했던 박정희는 보통학교 3학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키도 작고 왜소했던 그가 바로 급장(반장)을 맡으면서입니다.

당시 급장은 성적순으로 반에서 1등이 급장이 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성적뿐만 아니라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반 아이들을 휘어잡던 학생이었습니다. 조갑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보면 박정희의 보통학교 시절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박정희는 귀엽고 예쁘게 생긴 친구였어요. 별명이 '악바리','대추방망이'였지만 함부로 그렇게 부르지도 못했지요,일본인 교사들도 그를 귀여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가 급장을 지냈던 3학년때부터 6학년때까지 급우들 가운데 맞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동급생보다 키가 작았던 박정희는 겁도 없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으면 체구나 나이가 위인데도 뺨을 후려갈겼어요."

이런 증언을 조갑제는 지도자로 박정희가 통솔력을 어릴 적부터 가진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그가 통솔력을 무엇을 가지고 했는가를 봐야 합니다. 즉 박정희가 구사한 통솔력의 방법은 구타였습니다. 박정희의 반 아이 38명 대부분이 그에게 맞았다는 것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학교 일진처럼 학교 폭력의 주범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당시 폭력은 당연했다는 관점으로 보는데, 근현대사 인물 중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불량배를 폭력으로 제압한 사람들은 있어도, 반 학생 38명 전원을 팼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즉 박정희는 자신의 통치 수단을 폭력으로 이용하던 방법을 어릴 적부터 터득했던 것입니다. 

부마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출동시킨 박정희


박정희는 통치 내내 군인을 이용하여 국민을 억압했습니다. 그에게 국민은 막강한 군대를 동원해 제압하고 통치할 존재이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들을 감싸 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흔히 '조선인은 맞아야 정신 차린다'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가장 쉽고 빠르게 제압하는 방법으로 폭력을 동원했고, 그 폭력을 통치 수단으로 어릴 적부터 삼았던 사람이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었던 아이.

박정희가 다니던 보통학교에는 박정희처럼 9살짜리 아이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사회 현상으로 나이가 많거나 장가를 가고도 보통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보통학교에서는 조카와 삼촌이, 동네 형님이나 아저씨가 함께 공부하는 일도 태반이었습니다.

보통학교 다니던 박정희에 대한 이런 증언이 있었습니다.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권해도는 박정희보다 한 뼘 이상 키 차이가 났고,장가까지 들었는데 교실에서 뺨을 맞아야 했습니다."

권해도라는 사람은 조카뻘되는 박정희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뺨을 맞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뺨은 고통보다 창피함과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폭력행위입니다. 

구미보통학교 졸업사진의 박정희


대한민국은 씨족사회이자, 혈연이 강조된 문화입니다. 그래서 사람 간의 예의를 가장 중요시합니다.이런 관점에서 동네 형님이나 아저씨와 같은 사람의 뺨을 때린 행위는 '후레자식'이라고 불리는 정말 예의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이런 그를 보면서 혈연을 무시한 통솔력이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이 과연 통솔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 교사의 폭력으로 상처를 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박정희는 떠올리기 싫은 인물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남조선노동당 책임자(남조선노동당 군사부 총책임자 이재복(민간인) 박정희(군인)로 검거됩니다. 그는 검거돼 사형이 확실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알다시피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바로 남조선노동당의 동지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그 당시 '빨갱이'를 알아내는 방법은 고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고문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술서를 썼고 명단을 줄줄이 불러줬습니다. 그가  써낸 동지들은 대다수 죽음과 고문,투옥 당하였지만 박정희는 살아남았습니다. 

박정희에게 인간은 자신이 살기 위해 이용하는 존재이지, 그 사람들의 삶이나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 성공을 위해서는 친일도 상관없다.

박정희는 보통학교 시절부터 일본인 교사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을 좋아하는 이유는 성적과 일본에 대한 충성뿐입니다. 

공부를 잘했던 박정희는 공부=반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그가 어떤 급우들의 신망을 얻어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부 1등이 반장으로 된 시스템에서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공부를 선택했고, 그것을 통해 일본인 교사들이 좋아할 통솔력을 폭력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박정희는 공부만 잘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훈이 무참히 깨진 사건이 있는데 바로 대구사범에서 꼴찌를 했던 일입니다. 박정희는 구미보통학교에서는 매번 1등을 했지만 대구사범에서는 하위권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대구사법을 졸업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만주군관학교 추천서를 받을 정도로 대구사범에서도 뛰어난 학생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그것은 박정희가 교련주임 아리카와 중좌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박정희는 교련과 체육과목을 잘해 아리카와 중좌에게 인정을 받았고, 결석을 40일이나 했어도 대구사범을 무사히 졸업합니다. 이때부터 박정희는 공부보다 친일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면서 미화된 그의 과거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의 삶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평가는 당시와 그 이후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후대의 역사가 나를 평가해줄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박정희를 평가한다면, 그는 어릴 적부터 학교 폭력의 주범이자, 일본인에게 아부를 떨어 성공한 친일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새 학교폭력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의 과거부터 자행되던 뿌리 깊은 관행이 범죄가 아닌 카리스마나 영웅의 모습으로 미화되어 계속 내려왔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해봅니다. 

가난을 위해 친일을 했던 사람을 무조건 비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을 이겨내고 성공을 하기 위해 친일을 했던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과 아직도 그를 추앙하는 세력이 있다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고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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