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사

안티푸라민과 박카스D에 숨겨진 이야기.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고 대중적인 제약회사 제품으로 꼽는 것이 안티푸라민과 박카스입니다.
어릴 적 멍들고 삐고 다치면 무조건 안티푸라민을 발랐고,심지어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서,눈에
안티푸라민을 바른 적도 있었습니다.박카스D는 지금도 드링크제의 가장 대표적인 제품입니다.
피로회복제라는 이름으로 나른한 오후나 아침 숙취해소,심지어 그냥 음료수 대용으로 마시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상품 중의 하나입니다.

두 제품 모두가 추억을 간직한 제품이지만,그 안에 담긴 모습은 참으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과연 안티푸라민과 박카스D의 모습을 통해서,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기업인으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삼성의 이건희,
현대 정주영을 기업인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많을까요? 그들을 존경보다는 부러움과 비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봅니다.

하지만,그 실체를 알면 대부분 사람이 존경하는 기업인이 있으니, 그가 바로 유한 양행의 설립자인
故 유일한 박사입니다.유일한 박사가 유한 양행을 설립하게 된 동기는 민족자본을 통해 미래에 대한
준비와 아픈 조선인들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었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생애 참조:[韓國/시사] - 김우중 공덕비 VS 유일한박사 기념비 차이


안티푸라민은 유한 양행의 대표적인 제품입니다.안티푸라민에 대한 참고 문헌을 보면 유일한 박사가
어떻게 안티푸라민에 대해서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안티푸라민 브랜드 이름을 처음 제안한 이가 누군지에 대해선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창업자의 뜻에 따라 지어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안티푸라민에 담긴 뜻은 참으로 건조하다. ‘반대’라는 뜻의 안티(anti)에 ‘불태우다, 염증을 일으키다’는 뜻의 인플레임(inflame)을 합쳐 발음하기 좋게 바꾼 것이라고 한다. 제품의 특성을 그대로 설명한 ‘항염증제’ ‘진통소염제’라는 브랜드 이름이다. 회사 쪽은 “창업자가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지는 걸 경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1930년대 신문 광고에 ‘사용 전 의사와 상의하라’와 같은 문구를 넣은 것도 그같은 경계의 뜻이었다고 한다.<출처:한겨레 21 브랜드칼럼>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사용전 의사와 상의하라는 문구를 1930년대에 삽입하였고,창업자가 의약품의
남용을 경계했다는 사실은 지금도 놀랄 뿐입니다
.유일한 박사를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하나는 독립운동과 민족 부흥을 병행했다는 사실과 두 번째는 기업인으로 가진 자가 어떻게
사회에 봉사하고 기여하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박사는 9살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지금의 무분별한 조기 유학이 아닌,민족의
미래를 예견한 아버지 유기연의 적극적인 권유였습니다.14세 어린 나이에 활빈당 출신 반일 무장
투쟁 경험자인 박용만이 세운 한인 소년병 학교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이런 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한인 국방경위대인 맹호군을 미국에서 창설하게 하였습니다.유일한 박사는 미국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 "냅코프로젝트" 조장으로도 국내 침투를 준비했었습니다.

[韓國/시사] - 광복군OSS특수부대의 국내진공 침투작전은 성공했을까?

그는 무장 독립투쟁에 대한 꿈과 함께 민족자본을 통한 경제적 자립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사업을
시작합니다.아프고 헐벗은 조선 사람을 위해 유한 양행을 본격적으로 경영하면서,그는 돈보다는
조선인들이 저렴하게 약을 구입할 수 있도록 외국에서 수입하는 약품이 아닌 저렴한 안티푸라민과
혈청 등을 자체 개발하여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일한 박사는 종업원 지주제나 탈세를 용납하지 않는 등 지금의 기업도 하지 못하는 정도 경영으로
유한 양행을 이끌었지만,그가 죽고 나서 아들 유일선은 유산을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대학교까지
공부시켰으니 이제는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생애는 독립과 민족을 위한 기업 경영,그리고 교육과 사회 사업가로 오로지 자신보다
민족과 대한민국을 위한 생애로 그의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저는 안티푸라민이
지금보다 더 많이 잘 팔렸으면 좋겠습니다.물론 앞으로도 유일한 박사의 기업 이념을 유한 양행이
제대로 이어받고 지속한다는 가정하에서....



한국 회사들의 일본제품 표절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그러나 박카스D와 리포비탄D의
유사성은 표절 논란을 떠나서, 어떻게 가능한지는 지금도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박카스D와 리포비탄D는 제품의 디자인과 상표,성분까지도 거의 동일합니다.박카스D를 생산하는
동아제약은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지만,이 부분이 석연치가 않습니다.

리포비탄D는 1962년에 박카스D는 1963년 출시되었습니다.제품 출시 날짜를 놓고 보면 박카스D가
일본 대정제약의 리포비탄D를 표절한 것이 됩니다.그러나 동아제약은 자신들이 1961년 동일 성분의
박카스- 정을 출시하였기에, 절대로 자신들이 표절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1961년 박카스-정의 정제 외피가 녹아서 대량 반품 사건이 났고,1962년에는 앰플 용기로
다시 만들었지만,그 또한 안전사고가 잦아, 결국 1963년에 지금과 같은 드링크제가 나온 것입니다.

이미지출처:인니뽄매거진


상식적으로 드링크제가 표절 논란이 되고 있는데,자신들이 정제를 먼저 만들었다고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레모나처럼 과립제를 만들어서 팔다가 비타 500과 똑같이 제품을 만들고,비타 500을
표절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일한 성분,유사한 디자인,그리고 효능까지 같은 제품을 표절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 표절인지
참으로 알 수 없습니다.중국이 한국 회사 제품 짝퉁을 만들어 낸다고 한국 기업들 제소하고 난리를
치는데,왜 동아제약은 대정제약 리포비탄D를 표절로 고발하지 않았을까요?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운동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민족을 살리기 위한 물산 장려운동도
불매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대한민국에서 불매운동은 일제에 대한 항거와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수단 중의 하나였습니다.


동아일보는 1923년-1924년 사이 두 번이나 시민들에게 불매운동을 당합니다.그 이유는 1922년부터
보여준 동아일보의 논조가 문제였습니다.일본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인에게 가해졌던 억압
정책을 교묘한 문화 통치로 바꾸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이광수는"민족개조론"을 통해서 조선인이 아직 독립할 실력이 안 되었다고 주장하며
실력 양성 운동을 이야기합니다.그런데,이 실력양성운동이나 자치운동은 총독부가 조선인의 정치적
분출을 어느 정도 용인하면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민족적 분열을 조장하는 음모였습니다.

이광수는 1924년 1월2일부터 6일까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사설을 발표합니다.요약하면
일본의 주권 아래서 법률과 일본에 의해 주어진 범위 내에서 활동하자는 타협적인 주장입니다.

동아일보가 총독부의 주관하에 이루어진 정책을 따라 조선인의 독립을 분열시키자,동아일보에 대한
불매 운동이 두 차례나 발생하게 되었습니다.이것은 일제강점기 자체가 일본이 미개한 조선을 개화
시킨다는 문화통치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은 인권보다는 부를 가진 자와 야합하여 수출의 역군이라고 치켜세우던
여성 노동자를 탄압하였습니다.그 당시 기업인들에게 여공들은 그저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과
조선 시대 하급 천민이나 종년이라는 의식 외에는 없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성장 우선 정책으로 인권이 말소된 노동계에서 동일방직 여공들에 대한 분뇨사건과
남영 나일론 여종업원 구타 사건,그리고 해직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 남영 나일론 불매운동입니다.

그 당시 노동운동 단체들이 여공을 돕기 위해서 시민들과 연계해서 할 수 있는 대외적인 운동이 바로
해당 회사의 불매운동이었습니다.1970년대 불매 운동은  단순한 상품 불매 운동이 아닌 인권 탄압을
널리 알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01년 90개 시민단체가 모여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라는 상설연대 기구를 조직했습니다.
운동본부는 후소샤교과서 불채택 운동을 전개하면서 "새로운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후원 기업
상품 불매 운동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기업이 새역모 후원에서 이탈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다케시마 날" 제정에 분노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였고,
온라인에서도 네티즌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처럼 상품 불매운동은 그 배경과 의미가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표현의 방법과 수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08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포털 사이트 다음에 게시된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이 위법이라면서
삭제와 시정요구를 내렸습니다.2009년 법원은 조중동 광고주 불매운동을 벌였던 언론소비자 주권
캠페인 회원 2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조중동 광고주 불매 운동에 대한 글들이 포털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언론개혁시민연대는 조중동매경 종합편성방송채널 투자 기업들의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섰습니다.2008년과 2009년 사태를 보면서 이명박 정부 내에서 종편 투자 기업들의 불매운동은
법의 억압을 받고 또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SNS를 통해 종편 투자 기업 리스트가 돌아다녀도,결국 MB정부는 개인보호와 트위터의
무분별한 유언비어 확산들의 갖가지 병폐의 잣대를 들이대면서,규제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읽는 사람이 힘들 정도로 긴 포스팅을 작성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과연 불매운동이 위법인지를 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블라인드 처리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지만,마음 속에서는 왜 내가 일제강점기도
아닌 지금,무엇이 두려워 글을 쓰지 못할까라는 생각입니다.

상품 불매운동은 가장 평범한 시민이 현실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사회 변화의 행동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와 미국을 비롯한 인도에서도 시민이 했던 운동 중의 하나가 불매운동이었습니다.


친일했던 인물들이 권력을 잡고,부를 누리고 법을 위반해도,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상품 불매운동을 해도 위법이기 때문에 기업의 명단을 올리기도 무서운 세상입니다
.

한나라당과 정부는 국민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그러나 끊임없이 MB정부는
국민이 내는 목소리를 막고 있습니다.자신과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막을 권리는 이명박
정부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 세계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폭로하는 일은 자제해야 합니다.
하지만,정부를 비롯한 기업과 행정기관,사회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일제강점기나 정부 언론검열을 받는 시대는 아닙니다.그렇기에 더욱 자유롭게 개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어야 하는데,교묘한 정책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막고 있습니다.
흡사,일제가 조선인의 분열을 획책하면서 일제의 통치하에서만 활동하라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마천은 가장 나쁜 정치는 백성과 싸우는 정치라고 했습니다.
국민이 내는 작은 목소리와 최소한 할 수 있는 행동을 막지 않기를 바랍니다.

국민을 이기는 대통령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