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2014.10.27 08:11

 

 

박정희 전 대통령의 35주기 추도식이 어제 열렸습니다.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도식에는 새누리당 최고위원들이 참석했고, 전국적으로 그를 추모하는 행사도 대거 열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을 잡으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박정희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박정희가 죽은 1979년 10월 26일 이후 국민들은 배신감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의 죽음에 국민들이 왜 배신감을 느꼈는지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 막걸리 즐겨 마시던 서민 대통령? 시바스 리갈 홍보 대사'

 

박정희가 죽자, 갑자기 뜬 술이 있습니다. 바로 '시바스 리갈'입니다. 박정희가 마지막으로 마셨던 술이 '시바스 리갈'이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박정희가 양주를 마시다가 죽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신문과 대한뉴스를 보면 박정희는 항상 논두렁에 앉아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임금님과 같은 사람도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서민 대통령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가 죽었던 궁정동 만찬 사진이 공개되면서 박정희가 마셨던 술이 막걸리가 아닌 '시바스 리갈'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한때는 대통령이 죽으면서 마셨던 술이 얼마나 맛있느냐면서 너도나도 '시바스 리갈'을 찾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막걸리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순수 막걸리보다 막걸리에 '기린 맥주'를 섞어 마시는 '비탁'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박정희가 즐겨 마시던 술은 양주였습니다.

 

『그날은 朴대통령께서 경호원을 부르더니 「내 침대 머리 맡에 양주가 한 병 있는데 가지고 오라」고 해요. 경호원이 가져왔는데 바로 이 「로얄 살루트」야. 朴대통령이 혼자 좋은 술을 마셨다는 게 쑥스러우셨는지, 「朴浚圭(박준규·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가 미국 갔다 오면서 한 병 선물로 사왔어. 잠 안 올 때 한 잔씩 아껴 먹었어」라고 해요. 병을 들어보니 3분의 2쯤이 남아 있었어요. 그 자리에 10명쯤이 있었는데 한 잔씩 돌았어요. 처음 먹어봤는데 술 맛이 기가 막혀. 다들 「한 잔은 더 마실 수 있겠구나」 군침을 삼켰어요. 그런데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 남은 술은 침실에 갖다 두겠습니다」하고, 술병을 빼앗아 경호원에게 건네줬어요. 朴대통령이 「어이」 하고 경호원을 한 번 부르기만 하고, 「술병 여기에 놔둬라」는 말씀을 안 하시는 거야. 얼마나 야속하던지 말이야(웃음)』[각주:1]

 

박정희가 양주를 마시다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국민이 그를 양주는 입에도 대지 않는 서민 대통령으로 착각했다는 점이 배신감의 시작이었습니다.

 

언론이 보여주는 모습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국민들은 뒤통수를 맞은 셈입니다.

 

' 박정희와 함께 있던 미모의 여대생, 실제는 이혼녀'

 

박정희가 죽은 10월 26일 다음 날인 10월 27일자 신문에는 박정희가 만찬 도중에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신문들은 박정희가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만찬'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도했고, 국민들은 그가 말 그대로 '만찬'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여성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사망했습니다. 

 

당시 만찬에 참석했던 여성 한 명은 모대학 연극영화과 3학년 휴학 중이었던 신재순이었고, 다른 한 명은 가수 심수봉 씨였습니다.

 

당시 신재순 씨는 대학 2학년 때 결혼해 딸까지 두었던 이혼녀로 미혼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박정희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싱글 남녀의 만남으로 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났습니다.[각주:2]

 

웃긴 것은 김정일의 기쁨조에는 그리도 비난하던 사람들도 박정희가 여성들과 술자리를 즐기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나쁜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박정희가 여성들과 잦은 술자리와 만남을 가졌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육영수 여사의 사망으로 그가 외로웠다는 점과 일본 군국주의 문화로 성적인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여성편력은 육영수 여사가 생존해 있을 때도 있었고, 일본 군국주의 문화는 그만큼 그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점만 더 드러낼 뿐입니다.

 

박정희의 인생을 보면 분명 육영수 여사가 살아 있을 때와 죽었을 때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육영수 사망 이전에는 검소하거나 막걸리를 즐겨 마셨지만, 그녀가 죽자 막걸리보다는 양주를 검소함보다는 타락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재혼했었다면 달라졌을까요? 당시 박정희의 재혼을 추진했던 일도 있었지만, 그의 딸 박근혜 현 대통령이 반대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녀가 미혼의 나이에 청와대 안주인 역할을 포기했다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잠시 해봤습니다.

 

' 권력다툼이었는가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한 의거였나?'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였던 이유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설과 우발적으로 죽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최후 변론에서 했던 말을 보면 단순한 우발적인 범행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둘째 이 나라 국민들의 많은 희생을 막는것이오

셋째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것입니다.

넷째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10.26혁명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김재규의 주장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국민들의 많은 희생을 막는 부분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열흘 뒤에 박정희가 사망했는데, 만약 그가 죽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가 발포 명령을 통해 민간인을 학살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보면 부마사태에 대한 박정희와 차지철의 입장은 단호했으며, 그가 죽지 않고 그 분위기를 계속 유지했다면 어떻게든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박정희가 죽었을 당시 모든 언론은 차지철과 김재규의 권력다툼이라고 했지만, 김재규는 이미 'YH무역 여공 농성사건'과 '신민당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 사건' 등을 보면서 박정희가 판단력을 잃고 있다고 봤습니다.

 

김재규가 볼 때에는 이미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고, 박정희만 사라지면 민주주의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이엠피터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어도 민주주의 혁명은 일어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만약 부마항쟁을 총칼로 진압했다면 4.19혁명과 같은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를 바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임으로 국민이 자유를 누릴 것이라고 봤습니다.

 

"나는 혁명은 결행하였으나 혁명과업은 다른사람의 손에 의하여 수행될것이며,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요"

 

2014년 10월 26일, 과연 그의 말처럼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만끽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누가 선뜻 대답할 수 있을까요?

 

박정희가 죽었으니 민주주의가 회복되리라는 생각과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됐으니 경제가 회복되리라는 착각은 여전히 우리에게 10.26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1. 이필재 '박정희와 시바스 리갈' [본문으로]
  2. 중앙일보, J-스폐셜 월요인터뉴 2011년.10월 24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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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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