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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친일파 김성수를 미화,왜곡하는 동아일보 '인촌상'



동아일보는 9월 3일, 제27회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인촌상'은 동아일보 설립자 인촌 김성수의 이름을 딴 상으로 동아일보는 '민족의 지도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87년부터 인촌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촌 김성수를 민족의 지도자라고 내세우는 그 자체도 어이없지만, 김성수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라는 말에서는 말문이 막힐 지경입니다.

인촌 김성수가 과연 민족의 지도자이고, 그의 유지를 지금껏 받들어야 할 가치가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보고 평가하기 바랍니다.

'황군을 위한 국방헌금 1천원 헌납자 김성수'

김성수와 같은 친일파의 가장 큰 특징은 일제가 만든 관변 단체에 하나같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두 번이면 강압에 의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일제가 전쟁과 조선 억압, 통치,수탈을 위해 만든 조직에 대부분 임원으로 임명됐다면, 그것은 자의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촌 김성수도 일제 강점기 후반에 조선의 탄압과 수탈에 앞장선 대부분의 관변 단체에서 활동했던 기록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촌 김성수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고 8월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생활개선위원회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으로 임명됐습니다.

1939년 4월엔 경성부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의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았으며, 1941년 5월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을 지냈고 같은 해 8월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위원을 지냈습니다. 이어 9월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에 참여했으며 10월 감사에 뽑혔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흥아보국단' 은 한 마디로 일제의 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고 조선을 전쟁 보급창으로 만드는 데 협력한 단체들입니다. 그런 곳에 인촌 김성수의 이름은 절대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일제 관변단체에서 활동한 것뿐만 아니라,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의 일에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특히 황군이라 불리는 일제 군대의 사기와 격려를 위한 위문과 송영급전대를 주관했던 '경성군사후원연맹'에는 거금 1천 원을 국방헌금으로 헌납하기도 했습니다.


' 자기 학교 학생을 전쟁터로 내몬 지식인의 친일이 더 지독하다'

김성수는 지식인이 가지고 있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일본 제국주의 전쟁과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하기 위해 1937년 경성방송 라디오 시국강좌를 담당했으며, 학무국이 주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강원도 일대에서 시국강연을 다녔습니다.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매일신보의 1943년 8월 5일자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징병 격려문'에서는 <지난 오백년 동안 문약했던 조선이 징병제 실시로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면서 <징병을 통해 문약한 성질을 고치라>는 조선 지도자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의에 죽을 때까지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는 글을 매일신보에 싣고 <대동아 성전에 대한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주장했었습니다.

보성전문학교를 운영했던 인촌 김성수는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이라는 글과 보성전문학교 훈시에서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있는 생활을 하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지식인의 말은 그 자체로 진실처럼 대중에게 들립니다. 여기에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장의 훈시와 교사들의 말은 학생들의 인성과 품성,미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인촌 김성수는 세 치 혀와 펜을 통해 조선인이 일제를 위해 목숨을 바치길 강요했고, 어린 학생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몬 악질적인 친일파였습니다.

' 청산하지 못한 역사, 이렇게 왜곡되고 있다'

뉴라이트 성향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인 교학사 교과서의 역사 왜곡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교학사 교과서에는 친일 김성수를 아예 대놓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1940년 8월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사주인 김성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광복 때까지 은거하였다. 일제로부터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였으나 거절하였고, 일제가 주는 작위도 거절하였다” (교학사 교과서 김성수편)


교학사 교과서에는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하자 사주인 김성수가 고향으로 은거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김성수의 친일은 오히려 동아일보 강제 폐간 이후 두드러졌습니다. 앞서 말한 친일단체에 1938년 이후에 가입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하나 이상한 점은 교학사 교과서에 실린 김성수에 대한 설명 부분이 인터넷 위키백과에 나온 부분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위키백과는 말 그대로 어느 정도의 자료적인 가치는 있지만, 교과서에 실릴만큼의 정확도와 신뢰성은 떨어지는 편입니다.

교학사 교과서가 출간되기 전에 그 내용을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위키백과를 작성한 사람또한 몰랐을 것이고, 이는 교학사 교과서가 오히려 위키백과를 표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과서 저자가 인터넷 백과 사전을 표절했다는 사실은, 교학사 교과서의 수준이 얼마나 황당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교과서 표절은 아마 처음으로 보여집니다.


어떤 이들을 인촌 김성수가 매일신보에 기고했던 '문약(文弱)의 고질(痼疾)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글이 김성수가 명의만 빌려줬기에 친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촌 김성수는 1943년 11월 6일 매일신보사가 주최하는 '학병출진 관련 좌담회'에서 <학도병 지원율이 저조한 이유가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만약 명의만 빌려줬다면 지식인이 일제가 강요하는 논리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떠들고 다닌 것이 되는 것이고, 이런 글 한 편이 문제가 아니라 수십 편의 글과 강연회에서 그는 하나같이 일제의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이 일제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목숨을 바치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인촌 김성수의 증손자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이 법원에 냈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 청구 소송'에서도 재판부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징병제도실시 감사축하대회를 말하는 좌담회에 참석하고, '매일일신보' 등에 징병·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다수의 글을 기고했다"며 "일부 글은 사진과 함께 게재되는 등 그 글들이 모두 허위·날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습니다.


프랑스는 나치 부역 언론사를 처벌하면서 15일 이상 발행한 신문사는 그 재산을 몰수했고, 사주와 경영진은 사형 등의 법적 처벌을 내렸습니다. 프랑스의 처벌 기준으로 본다면 아마 조선,동아일보 사주는 사형을 당했어야 하고, 그 신문들은 모두 폐간됐어야 합니다.


채널A가 계속 보여주는 무슨 좌담이나 토론 등을 보면 마치 김성수가 '학병출진 좌담회'에 나와 학병과 징병을 찬양,선동,선전하는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어쩌면 창립자가 1943년 효과적으로 써먹었던 방법을 2013년에도 사용하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일제를 찬양하며 어린 학생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몬 사람을 과연 민족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그의 친일행각을 기리는 것이 어찌 우리 민족이 물려받아야 할 유산입니까? 동아일보의 '인촌상'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할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