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유학을 빙자한 유랑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왔을 때 저를 맞이한 것은 가족과 더불어 '국민건강보험 독촉장'이었습니다. 해외에 살았어도 국민건강보험 말소가 되지 않으면 지역 가입자로 고지서가 납부되고, 부과된 건강보험료는 무조건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과된 국민건강보험료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한국에 돌아와 살다 보니 독촉장에 압류까지 들어와 결국 분할 납부로 내긴 했지만, 필요하지도 않은 시기에 보험료까지 내고 '압류'라는 말에 벌벌 떨었던 순박한 부모님의 모습에 적지 않게 분통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나 오늘부터 국민 안 해'
'남쪽으로 튀어'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극 중 최해갑(김윤석 분)도 국민연금을 놓고 국민연금관리공단에 찾아가 싸움을 벌이다 '나 오늘부로 국민 안 해'라고 말을 하며 국민연금 납부를 거부합니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 한 장면. 출처:씨네21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 나오는 국민연금 납부 거부 장면을 놓고 국민연금공단이 삭제를 요구했다고 제작사는 주장하고, 국민연금공단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하는데, 어찌 됐든 국민연금공단 입장에서 보면 박근혜 당선인의 기초노령연금 사태로 불거진 국민들의 국민연금 불신과 맞물러 눈엣가시 같은 장면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 한 장면. 출처:씨네21
영화 '남쪽으로 튀어'를 보면 최해갑(김윤석 분)이 전기요금에 부과되는 TV 수신료에 항의해서 TV를 내던져 박살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현실에서도 이처럼 전기요금에 TV 수신료가 부과되는 것에 반발해서 TV 수신료 거부를 하는 시민도 꽤 많습니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했던 불합리에 대한 저항(?)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장면이 조금은 통쾌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국가의 정책이 실제 국민을 위하기보다는 여전히 실망스런 현실 때문이라고 봅니다.
힘들게 매달 국민연금을 내봤자 그에 대한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공영방송이라고 돈을 거둬가지만, TV에 나오는 뉴스 대부분과 영상들이 정부 편에 서 있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맞아, 맞아'를 외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영화보다 더 심한 현실'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통해 국가의 부조리와 현실을 비판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국가 권력을 비판하면 검열이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영화가 진짜 블랙코미디처럼 만들어지는 경우도 흔합니다.
▲영화 '투캅스포스터' 출처:씨네21
1993년에 12월에 개봉된 영화 '투캅스'는 개봉 당시에는 없던 자막이 1994년 1월부터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는 경찰의 실제 이야기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자막은 경찰의 요구에 의해 영화에 등장했는데, 어쩌면 이런 자막 자체가 코미디 영화를 더욱 코믹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찰이 아무리 실제 이야기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현실은 오히려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게 경찰의 비리가 등장합니다.
▲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일지와 경찰과 유흥주점,보도방 커넥션, 출처:서울신문,동아일보.
'함바집'사건을 비롯해 '그랜저 경찰','룸살롱 황제 이경백 사건'등 매년 경찰 비리는 끊임없이 터져 나옵니다. 경찰이 마사지 업소에서 보호비 명목으로 수천만 원을 받거나 오락실 단속 정보를 알려주기도 하고, 수사 청탁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수억 원을 받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해서 만들어지는 점으로 볼 때, 오히려 영화 속 내용은 현실보다 더 정화되고 약한 경우도 많습니다.
[시사] - 영화 '도가니'의 실제주인공과 숨겨진 공범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영화가 개봉되면 늘 권력기관이나 당사자들은 영화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고, 결국 법정 소송까지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영화 '그때 그사람들' 영화에 대한 네티즌 풍자 이미지.
사실 영화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영화에서 표현했던 분노와 좌절,풍자,해학이 여전히 현실에 존재하기에 영화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표현으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메시지 중 특히 정치적 표현을 놓고 정당이나, 보수 진영, 어르신들이 싫어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tvN여의도 텔레토비와 KBS 개그콘서트 정태호. 출처:tvN,KBS 화면 캡쳐
'여의도 텔레토비'라는 프로그램은 국정감사까지 등장했는데, 박근혜 후보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욕설을 잘하고 주먹다짐을 잘하기 때문에 새누리당에서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KBS 개그콘서트'의 용감한 녀석들 정태호씨는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다음에 '잘 들어, 개그는 절대 하지 마라'고 반말을 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영화나 방송 프로그램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프로그램이 종영되거나, 방송금지 처분, 명예훼손 등의 현실적인 법적 제재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표현의 위축이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됩니다.
영화와 방송이 현실을 반영했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건만, 현실은 영화와 방송을 현실로 끄집어내서 영화보다 더한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왜 남쪽으로 내려왔을까?'
'아이엠피터'는 제주에 내려온 지 3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최해갑처럼은 아니지만 비슷한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어떤 정치에 대한 반감이나 사회의식을 가지고 제주로 내려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전업 블로거'로 살고 싶은 생각만 하고 내려왔습니다.
▲아이엠피터가 살았던 농가주택이 영화 '남쪽으로 튀어' 최해갑의 집보다는 조금 신형(?)이다.
최해갑은 무정부주의자처럼 묘사됐지만, 현실 속 '아이엠피터'는 정치 얘기는 하지만 생활은 아주 '모범생(?)'에 가깝습니다. TV 수신료를 포함한 전기요금은 남들보다 더 많이 내고, 건강보험도 미리미리 지로로 내는 착실한 사람입니다. 세금은 원고료 자체가 모두 소득세 공제를 하고 지급되기 때문에 세금 포탈을 하는 경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1
그러나 영화 속 최해갑이 원하는 삶과 아이엠피터의 삶은 비슷한 모습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적 규범에 얽매여 살지 않겠다는 모습입니다. 최해갑은 어떤 정치적인 모습을 강조했지만 '아이엠피터'는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삶을 억압하는 이 시대의 '성공 원칙'이 싫었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인간의 등급을 알려주는 사회
성적을 위해 책을 읽어야만 하는 학교
집의 크기가 가족의 행복을 가늠하는 잣대
얼마 전 처제는 대전으로 이사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기 때문입니다. 농촌지역이지만 도시에서 살았어도 교육을 생각하니 조금 더 큰 도시로 가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가자마자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그저 할인매장용 책가방을 사주려고 했는데 그 동네 아이들이 백화점표 책가방을 사니 덩달아 10만 원이 넘는 책가방을 사줄 수밖에 없었답니다.
▲ 큰 아이 요셉이의 초등학교 입학식, 2012년 당시 1학년은 총 6명이 입학했다.
시골 작은 초등학교에 아이가 다니다 보니 무슨 백화점 옷이나 가방,비싼 브랜드를 입고 다니는 아이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 사는 지인들에게 물려받은 옷만 잔뜩 있는 에스더의 패션이 오히려 화제가 될 정도입니다.
서울에서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반드시 정장을 걸치고 가야 하지만 제주에서는 오히려 평상복 차림으로 가야지, 괜히 양복 입고 가면 별종 취급을 받습니다.
비싼 옷을 입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단지 내가 그 옷을 입지 않았을 때 외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사람은 상처받고 아파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85만원 짜리 중고차를 타고 다녀도 별로 창피한 적이 없지만, 서울에 끌고 가면 은근 눈치가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고 사는 삶에 대하여 자유롭거나 혹은 낙오자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강정마을 주민과 영화 '남쪽으로 튀어' 한 장면.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최해갑은 고향 섬을 어떤 '치외법권 지역'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합니다. 최해갑은 섬을 지키기 위해 코미디 요소를 가미해 어떤 해결책을 보여주는 장면을 연출했지만, 제주도 강정마을처럼 현실은 늘 권력에 의해 무참히 차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의 권력,공권력에 대한 도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코미디로 풀려고 했지만, 영화는 보는 내내 그저 단순하게 '피식' 그 자체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현실이 그래서 그럴까요?
▲ 아이가 어려서인지 '아이엠피터'는 항상 온 가족이 거실에서 함께 잔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에서 가족이 함께 자는 모습은 빈궁한 삶으로 전락한 듯해 보이기도 한다.
현실과 영화를 대입시켜 봐도 영화처럼 뻥 뚫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맞아 현실은 너무해'라는 말 이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엠피터'는 영화 '남쪽으로 튀어'를 세상 '성공'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 제주로 내려왔던 모습과 비추어 '오히려 최해갑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부정하고 모순된 권력과 오로지 대립을 통해 해결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는 있는 자들의 부정한 성공을 탓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경우도 많고, '맞아 성공하려면 불법도 저지르고 해야 하지'라면서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려고 하기도 합니다.
▲제주에서는 밭에서 수확하고 남은 농산물을 파치라 부르고 그것을 캐서 자주 집에서 먹기도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남들처럼, 사회 구성원들이 만든 '성공'에 따라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땅거지처럼 밭에서 주운 파치를 가지고도 충분히 맛난 음식을 해먹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웃으며 식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크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엠피터'는 아이들이 크면서 달라지기 전에 마음을 굳게 잡기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을 다시 깨끗하게 닦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거나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각자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임순례 감독은 국가권력,공권력에 대한 도전을 주제로 '남쪽으로 튀어'라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어쩌면 우리는 국가 공권력보다 더 개인을 옥죄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습을 먼저 이겨낼 수 있도록 삶을 바꾸어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법을 위반하지 않고, 남의 자유를 핍박하지 않으면서 좀 다르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성공과 행복은 획일화된 기계틀 속에서 찍혀지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다르게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이엠피터'는 국민연금이나 TV 수신료를 내기 싫어 남쪽으로 온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른 '아이엠피터'만의 행복을 찾기 위해 왔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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