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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땡박뉴스가 보도한 '새마을운동'은 유신정권의 재연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제2의 새마을운동을 제안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은 우리 현대사를 바꿔놓은 정신혁명이었고, 그 국민운동은 우리 국민의식을 변화시키며 나라를 새롭게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했습니다.

박정희의 제1 치적으로 손꼽히는 새마을운동을 그의 딸인 박근혜가 자랑처럼 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가진 문제점을 기억하며, 시대의 변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과연 새마을운동이 현대사를 바꿔놓을 만큼의 혁명이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방송이 말하지 않은 새마을운동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조사해봤습니다.

' 시멘트 회사를 살렸던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을 농촌살리기 운동으로 보면서, 주요 업적으로 마을 진입로 및 도로 확장, 지붕 개량 공사, 소규모 교량 건설, 공동목욕탕과 빨래터 만들기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업적을 박정희 정권이 모두 해준 것으로 인식하는데, 사실 박정희 정권이 실제로 했던 지원은 새마을 운동의 20~30%에 불과했습니다.


연도별 새마을운동 재원 내역을 보면 1971년 41억원,1972년 33억원으로 미비했습니다. 1973년이 되어서야 겨우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215억의원 예산이 집행됐습니다.

연도별 재원을 보면 대부분의 새마을운동 예산은 주민이 부담하거나 융자로 충당했고, 정부지원은 실제 새마을운동 사업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68년 쌍용시멘트 공장을 시찰중인 박정희와 쌍용 김성곤 회장.출처:대한뉴스

 
박정희는 1970년 10월부터 전국 3만5천개 마을에 각각 300여 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제공합니다.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우는 도로 확장과 마을 개량,교량 건설에 필수적이었던 시멘트를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사실을 박정희의 업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속내는 다릅니다.

쌍용시멘트 공장 등이 준공됐지만, 국내 시멘트 소비량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멘트 공장마다 재고가 쌓이자, 당시 쌍용시멘트 소유주이자 박정희의 정치자금을 관리했던  쌍용시멘트 김성곤 회장은 박정희에게 시멘트를 구입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김성곤의 요청에 따라 박정희는 <남아도는 시멘트를 부진한 새마을가꾸기 운동에 돌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라>고 지시했으며, 정부는 마을마다 시멘트를 제공해, 새마을사업에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농촌에는 시멘트만 내려왔지, 아무런 중장비와 건설인력은 보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을 도로 확장과 하천 정비 사업 등은 오로지 마을 사람들의 순수 공짜 노동력으로 완성됐습니다.


지금도 간혹 문제가 되는 것이 개인 땅이지만 새마을운동으로 도로가 된 땅들입니다. 분명 개인 재산이지만 도로를 만들 수 있다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보상은커녕 무조건 도로 만들기에 희생됐고, 농촌에서는 이런 이유로 맹지나,전이지만 도로인 경우도 남아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정부가 국가 예산으로 해야 했던 도로포장, 교량 건설 등은 결국 시멘트 업계의 남아도는 시멘트 땡처리와 사유재산, 개인의 무상 노동력으로 대처됐습니다. 그런 희생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박정희의 업적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 잘살어보세를 외치며 농촌을 떠난 농민들'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한 마디로 '잘 살아보세'라고 주장했습니다. 낙후된 농촌마을을 살린 구세주처럼 박정희가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 농촌이 잘 살아졌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생활 환경 개선과 도로,교량 등의 확충은 마을 주민의 노동력과 사유재산이 희생됐으니 박정희의 치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질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70년 농가소득은 255,804원으로 도시가구 소득은 381,240원의 67%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도시와 농가의 격차는 1974년 농가소득이 674,541원으로 도시가구 소득 644,520원을 넘으면서 오히려 농가소득이 도시가구를 앞지르기도 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농가소득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중곡가제'를 통해 농민들에게 높은 가격으로 쌀을 수매하여, 노동자의 저임금을 위해 쌀을 낮게 판매했습니다.

정부의 '이중곡가제'로 농민들은 단순히 먹고사는 농사가 아니라 수익을 낼 수 있는 상업적 농업인으로 바뀌었습니다.


농민의 수입은 늘어났지만, 그만큼 지출도 늘어났습니다. 상업 농업을 위해서 농기계를 구입하고, 하우스와 같은 시설을 설치하는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979년 농업소득이 1,531천원으로 늘어난 만큼 농가지출 가계비도 1,662천원 증가했습니다. 농업외 소득이 늘어나서 겨우 적자는 면하고 있지만, 실제로 융자금 등이 증가했기 때문에 농촌은 빛 좋은 개살구처럼 가계부채가 없는 집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농촌이 진짜 잘 살게 됐다면 농민이 굳이 농촌을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농촌인구 100명 가운데 1.3명만이 농촌을 떠났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의 농민이 농촌을 떠났습니다.

박정희가 죽기 전까지의 새마을운동만을 놓고 보더라도, 1970년과 1980년초반까지 계속해서 많은 인구가 농촌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매출은 늘어났지만, 지출과 농가부채도 늘어난 비효율적인 농촌 정책과 새마을운동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증거로 봐도 무방합니다.

박정희가 주장했던 '잘 살아보세'는 성공이 아니라 농민이 농촌을 떠나는 배경의 시작점이었습니다. 

'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새마을운동'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은 선거에 승리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박정희는 1969년 삼선개헌과 도시 노동자의 저임금과 노동운동의 여파로 도시에서 인기를 잃어만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지지율 하락을 올리는 방법으로 박정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농촌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낫을 들고 농민과 벼 베기를 하거나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은 농민들에게 자신과 같은 농민이 대통령까지 됐다는 동질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황소같이 부려먹자'라는 구호는 박정희가 대단히 많은 일을 하는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박정희는 단순히 보여주는 선거전략뿐만 아니라 새마을운동 사업을 통해 지역간 차별과 경쟁의식을 통해 자신을 지지해야만 마을이 잘 살 수 있다는 교묘한 관권 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모든 마을을 지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국마을 3만5천개 중에서 1만6천 곳에는 시멘트 500포대와 철근1톤을 지원했지만, 나머지 1만8천개 마을은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내세우는 이유는 새마을운동의 마을 승급 단계 기준에 따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1971년 대통령 선거와 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을 찍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관권선거을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 유신정권을 만들려는 제2의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분명 농촌을 변화시킨 운동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근원은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노력했던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의 노력과 일본이 강제적으로 실시했던 '농촌진흥운동'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부의 '아타라시이 무라쓰쿠리'를 그대로 번역한 '새마을가꾸기'는 진정한 농촌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단기간에 보여주기 행정만을 위한 부끄러운 정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새마을지도자라는 명목으로 마을마다 자신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조직을 운영했고, 이들은 '대통령 각하의 하사품'이나 '새마을 훈장'을 받기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근대시절 왕의 하사품에 온 동네가 잔치를 벌이고, 성은을 입었다고 주장했던 모습이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벌어졌고, 이는 그대로 유신정권과 유신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유신에 불타는 새마을운동의 기수'라는 결의문이 온 국민의 자랑거리가 되었던 새마을운동을 보면, 그것이 과연 지금도 이어져야 하는 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군사정권 시절, 9시 땡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뉴스가 대통령의 근황입니다. 2013년 10월 20일 KBS뉴스는 시작과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살려서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를 또다시 마련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고 강조하며, 미래지향적인 시민의식 개혁운동이 되길 희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을 말하거나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다시 꺼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마을운동을 시민의식 개혁운동이라는 포장과 정부조직을 동원한 전략이며, 방송은 유신정권 시절처럼 똑같이 앞다퉈 보도하고 있습니다.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새마을운동은 근대화는 앞당겼을지 몰라도 삶의 질은 형편없이 낮추었고, 정치의 도구로 이용됐습니다. 다시 제2의 새마을운동을 꺼낸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다시 재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