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사

세월호 선장처럼 '전쟁'나자 가장 먼저 도망친 이승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을 버리고 먼저 도망쳤다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선장에 못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자칭보수 세력에서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먼저 도망친 사람입니다.

' 불과 46시간 만에 서울을 도망친 이승만'

64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작전명 '폭풍'으로 한국에 대한 전면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이 남침하던 6월 25일 새벽 6시30분, 이승만은 서울 창덕궁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시하던 이승만에게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은 전쟁 발발 소식을 전합니다.


전쟁소식을 듣고 난 이승만은 그로부터 46시간이 지난 6월 27일 새벽 4시 서울을 빠져나가는 특별열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피난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고, 그를 수행한 사람은 부인 프란체스카,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비서 황규면, 경호경찰 1명 등 모두 6명에 불과했습니다.

이승만의 피난이 얼마나 황당했느냐면 국무위원들조차 6월 27일 아침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해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각주:1]

서울을 빠져나간 이승만은 6월 27일 오전 11시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다는 (원래 국무회의와 국회 등에서는 서울사수 →수원 이전을 검토했기 때문에) 의견에 따라 12시 30분 열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갔습니다.
 
' 이승만은 서울 사수를 고집했었다?'

일베나 자칭 보수 우익 사이트에서는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하려고 했다면서 아래와 같은 글들이 돌아다닙니다.


6월 27일 새벽 2시 이승만이 이기붕과 신성모 국방장관, 조병옥 등의 권유에도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주장했다는 이 글은 조금 어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승만이 경무대를 빠져나간 시간은 3시 30분 이전이기 때문입니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서울사수를 고집했던 이승만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별로 신빙성이 없습니다.


주한 미국 대사 무초는 미국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북한군의 전면 남침 소식과 함께 6월 26일 이승만이 대전으로 정부 이전을 결정했다는 보고를 합니다. [각주:2]

전쟁이 발발한 지 하루만인 6월 26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겠다는 이승만의 결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6월 25일 밤 9시 이승만은 무초 주한 미국 대사를 만나 '내가 공산군 손에 들어가면 나라가 곤란하게 되니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초는 '잡히는 것은 안될 일이지만 잡히기 전까지는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각주:3]

이승만은 이미 전쟁이 나는 날부터 본인 스스로 오로지 서울을 빠져나갈 생각만 했었던 것입니다.

' 이승만의 6.27방송은 아나운서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6월 27일 대구에서 대전으로 올라온 뒤 밤 10시부터 특별방송을 합니다. "우리 국군이 공산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서울 시민과 국민 여러분은 안심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승만의 6.27특별 방송을 놓고 본인은 대전에 있으면서 거짓으로 서울시민을 안심시켰다는 주장과 단순히 아나운서가 미리 방송을 틀어놓고 도망쳤다는 설이 있습니다.

당시 녹음을 했던 아나운서의 말은 이런 주장과는 다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신이 방송국 책임자인가 하고 물었다. 방송 과장이었던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당시 6.25전날 대전방 송국장이 서울에 출장 가서 대전에 없었다)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직접 나에게 내렸다.

1. 이 방에서는 절대로 나가서는 안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저녁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여 전 국민이 듣도록 하라.
4. 누가 묻던지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5. 이 대통령이 방송한다고 미리 누설해서도 안 된다는 것 등 이었다.
<출처:방우회, 납북국회의원유족회>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각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이지만, 실제 이승만이 대전에서 녹음하면서 서울시민을 안심시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하루 전인 6월 27일, 모든 신문들은 '국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북상 중'이라는 오보(언론 조작)를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승만정권은 한국전쟁에 대해 처음부터 국민을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오히려 국민을 위험에 빠뜨렸던 이승만'

한국전쟁이 발생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북한군은 미군이 남한에 없어서 충분히 남한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남한에 병력과 장비,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을까요?


이승만은 평소에도 북진통일을 주장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의 허풍 때문이었습니다.


"각하께서 명령만 내리면 언제라도 각오가 돼 있다. 점심은 개성에서 먹고, 저녁은 평양에서 먹고, 단 7일이면 북진통일을 완수할 수 있다"

매번 전쟁을 통해 북진통일을 이루겠다는 이승만정권에 대해 미국은 병력과 무기를 남한에 놓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미국은 이런 이승만정권의 무모한 북진통일론에 대해 만류를 하면서 전쟁을 하지 못하게 미군 병력과 무기를 철수시켰던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만 있었어도 한국전쟁이 났을 때 막을 수 있는 무기와 장비가 있었겠지만, 오히려 허풍과 무모한 반공정책으로 남한 국민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입니다.


이준석 세월호 선장이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나자 서울시민을 버리고 도망친 이승만을 향해서는 찬양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공과를 말하며 그를 떠받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엠피터는 그가 한국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국민을 버리고 도망친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만 명의 목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은 한국전쟁 64주년입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국민의 목숨에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기에는 너무 무섭습니다.

  1. 돋보기 근현대사 공저 임영태 [본문으로]
  2. 대통령기록관 이승만편 [본문으로]
  3.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저자 신기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