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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근혜의 '할리우드 액션'에 경고를 보내라



박근혜 대통령의 입이라 불리는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4대강 사업과 대운하'에 관한 감사원 보고서를 놓고 '국민을 속인 것'이라 발언하자, 대한민국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선 긋기를 하려고 한다고 논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엠피터는 이것은 국정원 사건과 18대 대선의 문제점을 회피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전략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MB정권과 박근혜 정부의 과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아직도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사이가 정치적 대립 관계로 전혀 다른 정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두 사람의 밀월에 의해 어떻게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 자리를 놓고 싸웠던 MB와 박근혜'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을 놓고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후보는 진짜 피 터지게 싸웠습니다. 이명박 후보의 BBK 사건을 공격했던 장본인도 박근혜 후보였고, 친이,친박의 전면적인 갈등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박근혜와 만났지만, 협력 관계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2008년 총선에서 친이계가 공천되고 친박이 대거 탈락하자, 박근혜는 특유의 발끈함을 보였습니다.

"한나라당 공천이 잘못돼 가고 있고, 기준도 없는데다 엉망이다.오로지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BBK 이야기를 한 사람은 공천에 안 된다는 둥 살생부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다" (박근혜)



친박계 탈당 등으로 친이,친박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2008년 5월 10엘 박근혜와 이명박 대통령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촛불집회를 들먹이며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공격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가 요구했던 친박 복당을 '당이 알아서 할 문제'라고 반박했습니다.

2009년 1월 두 사람은 극비로 만났지만, 이후 청와대가 극비회동을 흘렸다고 박근혜는 반발했고, 2009년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는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며 이명박 대통령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 차기 정권은 무조건 박근혜가 맡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의 갈등은 화해될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듯했지만, 이런 대립을 한 방에 해결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형님이자 '상왕'이었던 이상득 의원이었습니다.


대통령의 형님이었던 이상득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이 끝난 뒤부터 차기 정권은 무조건 '박근혜'라는 신념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한나라당에 가장 중요한 건 정권 재창출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전)대표는 한나라당의 자산이다." (경북지역 언론인 모임에서 이상득 의원)

이상득 의원은 왜 이토록 차기 정권은 무조건 박근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친박 인사와 이상득의 정치적 양아들 원희룡 의원과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친박인사) “지금 대선후보 중 MB 퇴임 후 MB와 SD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전) 대표뿐입니다.”
(원희룡)“무슨 말씀이신지….”
(친박인사) “그럼 이렇게 말씀드릴까요. MB가 박 대표의 대선 행보를 방해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박 대표가 대선에서 진다고 해도 야당 대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당 대표’ 박근혜가 MB와 SD를 청문회에 세우지 말란 법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노련한 정치꾼 이상득 의원은 이미 자신의 동생이 퇴임 후 겪을 일을 예상했고, 이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박근혜를 선택했습니다.

혹자는 박근혜 이외에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친이계가 나서 2012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제대로 싸웠다면 박근혜 후보가 과연 대선까지 갈 수 있을 여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런 의문은 아래에서 더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 정권연장을 위해 서로 손을 잡은 MB와 박근혜'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실세였던 이상득 의원의 힘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의 화해와 협력은 앞서 말한 갈등이 있기는 있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급물살을 탔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의 화해는 가장 먼저 정진석 정무수석을 선택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충청도 출신에 세종시 수정안에도 반대표를 던져 친박계와 친했던 정진석 정무수석 임명은 MB가 아닌 박근혜의 허락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임태희는 정진석 임명 전에 박근혜를 찾아갔고, 박근혜는 임태희의 정진석 정무수석 추천에 '그러면 저야 좋죠'라는 답변을 했다.또한 정진석은 박근혜의 '여성대통령'의 기반이었던 각국 여왕과의 만남도 지시한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정권 연장의 분수령은 2010년 8월 21일에 열린 청와대 회동부터입니다. '8.21 회동'이후 이명박은 박근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고, 박근혜 또한 이명박의 비리와 문제를 눈감아줬습니다.

어떤 이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을 비판한 박근혜를 보면서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박근혜가 대구에 가서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를 비판하자,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 발언을 했다는 점을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MB정권의 '민간인 사찰','4대강 사업','MB 사저 특검 연장 거부'을 비판하지 않고 수용했던 박근혜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NLL도 DMZ처럼 지켜야 한다'고 발언함으로 박근혜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디스해주는 친절함도 보여줬습니다.


박근혜와 이명박이 정권 연장에 협력했다는 증거는 바로 '김무성'입니다. 김무성 의원이 왜 중요하냐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가장 1등 공신이자, 이명박 정권과의 커넥션이 바로 '김무성'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박근혜 후보는 김무성 의원을 가장 싫어했던 인물입니다. 친박계였지만, 나중에 친이계 신주류로 등장한 김무성은 다혈질에 보스 기질 때문에 '무대'(김무성 대장)로 불렸습니다. '배신'을 싫어하고 충성과 무거운 입을 중시하는 참모만 좋아했던 박근혜와는 상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김무성이 박근혜 캠프 총괄선대본부장이 됐을까요?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둔 박근혜 캠프는 안대희 정치쇄신위원장의 한광옥 영입 반발과 캠프 내부의 극심한 진통으로 대선에서 승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김무성 의원이 들어오면서 박근혜 캠프 상황은 360도로 바뀌었습니다. 김무성의 MB정권 조직력 동원에 힘입은 캠프 진영 정리, 권영세의 국정원 회의록 입수,정문헌의 NLL 발언은 밀리던 선거판을 일순간에 뒤집었고, 이는 침몰하는 박근혜호가 항구로 직진할 수 있게 만들어줬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조직과 현직 대통령은 선거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탄핵당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한나라당이 했던 행태로 본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은 선거법 위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 - 박근혜,이명박 회동 '정권 재창출 위한 밀약?'

결국,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대통령은 2010년 8월 이후, 정권연장에 협력했던 사이였고, 이 두 사람이 결과와 책임을 모두 공동으로 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명박,박근혜,이상득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합성 이미지. 편집:아이엠피터


MB와 박근혜는 정권 재창출이 아니라 '정권연장'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들의 협력 관계를 깨뜨릴 방법은 오로지 MB를 국정조사 증인으로 청문회 대상으로 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정권 연장을 위해 일한 이상득이지만 동생의 구속을 무작정 바라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대강 대운하 보고서가 나왔지만, 국정조사를 하려면 9월이나 지나야 합니다. 이 말은 그 시기가 될 때까지 결국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국정조사는 불가능하고 NLL 대화록 정국으로 '18대 대선 문제'는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새누리당은 정권 연장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국민은 그들의 불법적인 합작을 깨뜨리고 정의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와대보다는 MB를 공략하되, 할리우드 액션과 같은 박근혜 정부의 모습에 단호히 옐로우카드를 제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