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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김용준 사퇴' 수첩공주의 한계를 보여주다



박근혜 당선인의 초대 총리지명자였던 김용준 인수위원장이 결국 총리직을 사퇴했습니다. 25일 총리 후보에 지명된 지 4일만입니다. 김용준 후보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윤창중 대변인을 통해 "저의 부덕의 소치로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 드리고, 박근혜 당선인에게도 누를 끼쳐드려 국무총리 후보자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김용준 총리 후보자의 사퇴는 아직 취임도 하지 않은 박근혜 당선인에게 큰 부담감을 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인사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보여준 사례이자, 앞으로도 과연 이렇게 인사를 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 때문입니다.

' 처음에는 신화, 나중에는 부정부패의 화신'

김용준 후보자가 처음 총리에 지명됐을 때만 도 무난히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봤습니다. 특히 박근혜 당선인은 김 후보를 가리켜 "김용준 총리 지명자가 살아온 길을 보면 늘 약자 편에 서서 희망을 줘 왔다"며 "나라의 법치와 원칙을 바로 세우고, 무너진 사회 안전과 불안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갈 적임자라고 생각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박 당선인이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만드는 적임자라고 추천했던 김용준 후보자는 총리 지명 바로 다음날부터 각종 의혹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용준 총리후보 사퇴 일지, 출처:서울신문


총리 후보로 지명된 다음 날, 두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과 부동산 투기 의혹 및 편법 증여 논란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추가 재산 형성 과정에서 부동산 매입이 부동산 투기라는 의혹을 받았고, 거짓 해명으로 그의 신뢰는 점점 더 잃어만 갔습니다.

김용준 후보는 "자료가 모아지는 대로 수일 내 입장을 밝히겠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자료를 입증하지 못하고 본인 스스로 사퇴를 선택하게 됩니다.

김 후보가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고, 그가 관련 의혹에 대해 공식적인 해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쏟아진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100프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의 사퇴가 이런 의혹 때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초대 총리로 지명한 장애인으로 신화를 창조했던 법치 중심의 인물이 부정부패 의혹 때문에 불과 4일 만에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 인사검증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았던 김용준 총리 후보'

이번 김용준 총리 후보의 지명은 박근혜 당선인을 비롯한 소수 사람만 알고 있었습니다. 보안을 철저히 강조한 인수위원회의 성격상 그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박근혜 당선인의 총리 지명 발표 이전에 과연 인사검증 시스템을 거쳤느냐는 점입니다.

보통 공직자를 임명하기 위해서는 인사 후보를 선택하고 그 후보들의 검증을 거칩니다. 그 검증을 통과하면 발표를 하고, 검증을 통과하지 않으면 다른 인물을 다시 물색하는 것이 대부분 공직자 임명의 절차입니다. 그런데 박근혜 당선인은 김용준 총리 후보를 지명하면서 이런 시스템을 전혀 가동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인사검증 시스템으로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을 손꼽습니다. 그것은 청와대가 가진 막강한 권력이 가장 적법하면서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는 인사수석실을 폐지했다가 나중에 인사기획비서관실을 만들었다.


청와대에는 각종 공직자에 대한 인사 추천을 하는 '인사수석실'이 있습니다. 이곳은 후보자를 추천하는 곳으로 여기서 통상 3배수에서 5배수 정도의 추천받은 인물 리스트는 '민정수석실'로 넘겨져 검증을 받게 됩니다.

검증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맡는데, 여기는 비서관 1명과 행정관 10여명 기타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는 검찰,경찰,국정원,감사원,기무사,국세청,행안부,지경부 등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다수 있는데, 이들은 추천받은 인물에 대한 각종 자료를 소속 기관에 요청해 수집합니다. 

국세청의 과세자료와 부동산 거래내역 등을 제공 받아 토지 실사까지 벌여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을 조사하기도 하고, 병무청의 병역 자료를 넘겨받아 병역면제 의혹 등을 철저히 검증하기도 합니다. 출입국 관리사무소 자료를 통해 이중국적이나 건보료등의 부당 행위 교차 검증까지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후보자를 조사합니다. 

국정원,경찰청,감사원을 통해 가족관계,종교, 세간의 평판,사생활 불륜이나 음주운전이나 범죄 사실 등을 찾으면서 모든 국가기관의 행정시스템과 자료가 총동원되기 때문에 보통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을 한번 거치고 나면 그 인물의 90%이상은 다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아니 이런 인사검증 시스템을 거쳤는데, 어떻게 이명박 정부의 인사청문회는 그 모양일까?

▲2010년까지의 자료로 정동기 감사원장과 이동흡 헌재소장이 빠졌다.


문제는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이 아니라[각주:1] 그런 검증을 거친 의혹의 진실을 알고 강행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참여정부 인사청문회 낙마율은 3.4%에 불과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11.6%입니다.[각주:2] 참여정부는 아예 인사검증에서 문제가 됐던 인물은 모두 배제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그것을 알고도 후보로 지명됐기 때문에 낙마율이 높은 것입니다. 

만약 김용준 총리 후보자가 이런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을 거쳤다면 아예 총리 후보 지명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부터 각종 비리의혹의 인물이라면 박 당선인이 주장했던 말이 거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 후보자는 이런 시스템을 거치지 않았고, 결국 사퇴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 수첩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박근혜 당선인은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모든 사안을 기록하고 정리한다고 해서 속칭 '수첩공주'라고 불립니다. 기록을 잘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수첩만을 의존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수첩은 제한적인 정보만을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기록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떤 정보를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을 단편적으로 기록합니다. 물론 개인의 생각이 녹아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 자신의 기분이나 감성, 그리고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컴퓨터를 동원한 디지털 기기는 막대한 정보와 무제한적인 정보수집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출하는 별도의 시스템이 필요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감성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 위주의 사실성이 더 요구됩니다.

소설가나,창작가 등은 컴퓨터보다는 수첩이 유리합니다. 창작은 어떤 사실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성이 더 필요로 하는 개인적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컴퓨터와 같은 시스템은 개인의 생각보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한 예측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유리합니다.

▲애니메이션 산학리더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의 의견을 메모하고 있는 박근혜 당선인, 출처:민중의 소리.


박근혜 당선인이 자신의 수첩에 기록하는 것은 그녀만이 보고 들은 얘기들과 감성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총리 후보자 검증시스템의 목록을 적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 이 사람은 총리감이다'라는 단편적인 감정만 적었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아날로그 시대에서 국민이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신문과 잡지,TV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통 사람도 어떤 사안에 대한 정보를 찾고자 하면 어마어마한 자료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던 의혹도 지금은 순식간에 알 수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나오는 각종 정보를 취합해서 그것에 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그런 정보 없이 그저 자기 생각만을 밀고 나가는 것은 지금 시대와는 맞지가 않습니다.

▲박근혜 당선인의 수첩내용. 출처:연합뉴스


수첩에는 사안에 대한 문제와 현장 여론의 느낌을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안은 그 수첩에 적을 수가 없습니다. 대통령 제도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는 행정부,헌법기관,공공기관,정부위원회 위원장 등 총 8,500여개에 달합니다. 그중에서 고위직만 따져도 300개입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속기사 수준의 기록 능력이 있어도 300개의 인물을 정리하려면 수첩만 수백 권은 있어야 합니다.

박근혜 당선인은 아직 대통령 취임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모든 것을 자신만의 생각과 뜻에 의존해 결정하려고 합니다. 그녀가 천재이거나 모든 정보를 수첩에서 얻을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국가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운영할지를 먼저 고민해봐야 합니다.

앞으로 5년간 최소한 300개의 고위직 임명에 대해서는 박근혜 당선인이 수첩보다는 철저한 인사검증 시스템을 통과한 후보만 임명하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1. 참여정부에 수립된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을 이명박 정부가 무시하거나 축소한 경향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은 유효하다. [본문으로]
  2. 참여정부의 전효숙 헌재소장과 윤성직 감사원장은 개인 비리가 아닌 임명절차와 정치적 시비가 문제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