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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한국전쟁' 일본에게 내린 神의 선물


요코하마에서 한국으로 보낼 군수문자를 선적하는 장면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는 아픔과 시련의 역사이지만 이 전쟁은 일본을 속칭 떼 돈을 벌게하고
일본을 기사회생하게 만든 전쟁이었다.

한국 전쟁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극빈과 최악의 경제 상황,패전에 대한 아픔으로
신음하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일본의 경제는 1920년대 수준으로 돌아간 상태였다.이런 일본의 경제 상황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전력난으로 모든 공장은 가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견디나 못한 일본의 요시다 수상이 미군정청에 사정 사정해서
1946년에서야 중유 수입을 허가 받아 경사생산방식을 도입하게 되었다.


여기에 패전에 대한 피해의식과 인적 물적자원의 고갈로 일본은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서 오죽하면 미군정청이 1949년 2월 디트로이트 
은행 대표인 조셉 돗지를 공사의 자격으로 파견시키고
재정의 균형화,금고의 신규대출 제한,보급금 삭감등을 통해 긴축 재정을 
시도했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완전 최악의 경기 침체기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은 강남 과수원땅이 개발되어서 벼락 부자가 된 졸부보다
더 엄청나게 재기를 하게 되었다.


전쟁 패망으로 이랬던 ↑ 일본이 ↓ 이렇게 변했다


자위대: 무장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본이 자위대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 한국 전쟁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민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를 영원히 포기한다. 일본 헌법 9조


전쟁 패망 후 일본은 무장을 금지당하고  무력행사 또한 절대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모든 권력과 치안은 미군정의 지위 및 명령을 받아야 하는 현황으로
일본 시민들은 패전국으로써의 모든 책임을 지고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경찰은 치안을 유지하기 보다는 교통정리나 민원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으로
공권력 아닌 공권력을 유지하고 버티고 있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치안유지가 주목적이 된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은 미군기지를 지킬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라서 부득이
7만오천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경찰 예비대를 만들어 증가시키게 되었다.
이들은 결국 1952년 보안대로 변경했다가 1954년 자위대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날 최첨단 자위대라는 막강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 전쟁이 아니면 자위대는 커녕 제대로 된 군사력을 조금도 보유할 수 없는
원초적 국가였지만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경제력:일본의 공업화와 근대화 경제의 부흥이자 현재 일본을 만들어 준 기회 한국 전쟁

일본 경제는 원자재의 부족,전력난,영업 부진등 각종 악재에 노사간의 대립갈등으로 인해
완전 망하기 일본 직전이었다.일본 굴지의 토요다 자동차 회사를 예를 들어 보자


토요다 자동차가 얼마나 노사간의 문제에 힘들었는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도 생산직 노동자를
더 이상 고용하지 않을 정도로 그 당시 토요다는 노사분쟁과 각종 악재로 힘들었다.
하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서 토요다는 각종 군수차량 및 부품 생산으로 인해서 엄청난
생산판매를 하게 되었고,이는 자동차 생산 기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 원자재 수입 규제 완화로 엄청난 원자재 수입
■ 전력,철강.해운,석탄등 기간 산업과 설비 투자
■ 막대한 군수물자 생산으로 인한 기술력과 생산력 향상 
 

1950년 한국 전쟁 때 일본은 정부 기관인「특수 조달청」을 마련해 독점 재벌의 총연합 합체인
「일본 경제인 연합체」내에 「방위생 출산 위원회」를 설치해, 이 기관을 통해서 미국이 요구하는
군수품의 생산을 적극적으로 보장했다.1952년 6월에 도달해 군수품의 생산에 약 400여개의 공장이 
 참가했고, 후에 그 수는 860여개로 증가했다.

이 당시에 미군에게 제공하는 군사물품의 금액만 25억달러이상이었다고 하니 이 금액이
일본 경제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의 기업 회장들은 이구 동성으로 한국 전쟁은

천우 즉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정치,외교 부흥:남의 피의 댓가로 이룩한 일본의 정치 안보 외교

미국과 일본은 적대국가였으며 미군정청은 일본의 재무장과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일본은 1951년 미일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은 일본을 새로운 거점으로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파워를 지키는 교두보로 만들었다.


일본의 그 당시 내각인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한마디로 정신 못차리는 인간이었다.
패망과 전쟁 원인 제공자인 일본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자신들이 왜 졌는지 또한 반일감정이
왜 있었는지를 모르는 한마디로 똘아이 극우주의자중에 하나였다.
오죽하면 맥아더가 제3의 인물로 수상을 임명할려고 했었을까..


이런 똘아이를 우리 이승만 아자씨는 만나서 어찌 어찌 한미일 동맹 어쩌구를 외치고 도움을 받고
한마디로 요시다 수상은 남의 나라의 피의 댓가에 대한 즐거움은 혼자 독차지하고 돌아이처럼
자신이 잘나서 일본의 경제 부흥과 정치 외교가 성공했다고 치부한 인물이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일본의 경제 부흥에 있어서 일본의 문예춘추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전 인류 역사상 타인의 불행으로 완벽하게 행복해진 예는 한국전쟁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일본은 전후 패망으로 인해서 발생한 모든 악재와 어려움을 한국전쟁 단 한방에 해결하고
현재의 경제와 정치 외교 안보 모든것에 대한 이득을 취한 나라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아픔에 대해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그 동안 우리 나라에서 일본이 한국전쟁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득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거나 심도 깊게 다룬 적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이다.

자신들의 치부와 아픔을 우리 한 민족이 모두 갚아 주엇다는 사실을 잊고
오직 자신들의 행운이라고 믿으며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일본인들은 착각하고 있다.
우리의 아픔이 그들에게는 행복과 기회였으며
신이 자신들에게 준 선물이라는 사실로...

하지만.
그 선물안에 감추어진 타 민족의 아픔과 역사를 그들은 잊으면 안된다.
그 피의 댓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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