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악연으로 유승민 부친 빈소에 조화 안 보냈나?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부친 유수호 전 국회의원이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의 부친이자 13.14대 국회의원이었던 까닭에 빈소에 박근혜 대통령이 조화를 보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국회의장이나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의 조화만 있었습니다.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지 않은 이유가 유승민 의원과 박 대통령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유승민 의원 측이 대통령의 조화와 부의금을 사양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의 근조 화환 하나를 놓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유수호 전 의원과 박정희 간에 벌어졌던 일이나 유 전 의원의 삶을 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 등이 있었기에 한 번쯤 그 역사적 사실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정희 눈 밖에 난 유수호 판사'
유수호 전 의원은 판사 출신의 정치인입니다. 그는 1972년 사법파동으로 법복을 벗은 인물입니다. 사법파동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따르지 않을 법관 41명을 재임명하지 않은 사건을 말합니다. 박정희가 볼 때 유수호 판사가 맘에 들지 않았던 첫 번째 사건은 '제7대 대통령선거 부정사건'이었습니다.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4.27 대통령선거 대국민보고서'를 통해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신민당은 '4.27 대통령선거 부정의 진상은 이렇다'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부정선거라고 주장했습니다.
① 공화당 정권은 야당 선거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② 공화당 정권은 관권과 국고를 선거에 투입했다.
③ 이번 선거는 행정선거와 부패선거의 극치를 이루었다.
야당의 대선 부정선거 주장은 실제 재판에서도 입증됐습니다. 부산지법 유수호 부장판사는 4.27 대통령선거 부정개표 사건 선고 공판에서 병보석 중인 윤동수 전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습니다. 당시 울산에서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득표율을 허위조작 발표하거나 투표용지 수십 장이 부족해 개표 중단이 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유수호 판사는 '피고인들은 공명선거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고 유권자의 주권을 변조 조작하여 민주질서를 파괴한 행위를 벌였기에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판결했습니다. 당연히 박정희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을 훼손한 판결이었습니다.
1971년 유수호 판사는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다가 구속된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정길의 영장실질심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며 석방합니다. 독재정권에서 나오기 힘든 결정을 유수호 판사가 해버린 것입니다.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한 박정희는 1973년 3월 41명의 판사를 면직하는데 당연히 독재자의 눈 밖에 난 부산지법 유수호 부장판사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독재 정권의 앞길을 재판에서 막은 유수호와 법관으로서의 길을 막은 박정희,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벌어졌던 남영호 사건, 세월호와 똑같았다'
유수호 판사의 판결 중에는 세월호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두 건 있었습니다. '아치섬 거룻배 사건'과 '남영호 사건'입니다. 두 사건은 세월호 침몰 사건에서 벌어졌던 통신, 구조 문제, 선장에 대한 살인죄 적용 등이 똑같이 불거졌던 사건이었습니다.
1971년 21살 허선덕 양은 부산항 아치섬 앞에서 거룻배를 타고 가다가 작전 중인 해군 경비정에 받혀 숨졌습니다. 허양 가족 등은 선덕양이 해녀로 가족을 부양했다며 1천39만 원의 손해배상 및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부산지법 유수호 판사는 '작전 지역 내에서 군이 민간인과 충돌한 이후 구조하지 않고 그대로 떠난 것은 명백한 잘못이며, 국가 배상의 책임이 있다'며 국가는 허양 가족에게 4백65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유 판사는 해군 경비정이 짙은 안개로 시야가 흐리고 파도가 높아 충돌했기 때문에 고의성은 없다고 봤지만, 구조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인정했습니다.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제주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남영호가 침몰 319명이 사망했습니다. 남영호 침몰사건의 원인은 정원초과와 과적이었습니다. 세월호의 침몰 원인과 유사합니다.
구조작업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도 똑같았습니다.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남영호는 구조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난 신호를 받고 출동해 구조한 선박은 한국 해군이나 해경이 아닌 일본 어선과 순시선이었습니다. 일본 선박 구사카키호는 조난 신호를 받고 한국에 알렸지만, 무시당했고 결국 12명만 구조됐습니다.
세월호 선장처럼 당시 검찰은 남영호 선장에게 살인죄를 적용 사형을 구형했지만, 유수호 부장판사는 업무상과실치사죄만을 인정 금고 3년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업무상 선장이 주의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못한 점은 유죄이나 한겨울밤 막막한 대해에서 침몰되면 소중한 생명을 뺏앗기는 것이 분명한데 결과 발생을 예견했을 까닭이 없다'며 살인죄에 대한 무죄 이유를 밝혔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벌어졌던 남영호 사건과 그의 딸 박근혜 정권에서 발생했던 세월호 침몰 사건을 보면 인재는 시간이 지나도 또다시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진실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유수호, 철새 정치인? 의리의 정치인?'
유수호는 사법파동으로 법원에서 쫓겨난 후 변호사로 개업합니다. 이후 1978년 공화당 대구지역에 공천을 신청했으나 탈락했습니다. 유수호는 1985년 민정당 대구 중,서구 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되고 1988년 13대 총선에서야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유수호 전 의원의 당적을 보면 변화무쌍합니다. '공화당→민정당→민자당→새한국당→국민당→무소속→자민련'까지 무려 7번의 당적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3당 합당이나 새한국당과 국민당 합당의 이유도 있었지만, 철새 정치인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일부에서는 그를 가리켜 의리의 정치인이라고 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김윤환 전 의원,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 등과 경북고 동기였고, 1993년 박철언이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되자 그의 변호를 맡아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다 변호사 퇴청 명령을 받았던 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수호 전 의원을 철새나 의리파 정치인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여러 번의 당적 변경과 초원복집 사건 고발인 등으로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연관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당의 양심세력, 여당의 비판세력'과 같은 선거구호나 '과욕이 되기 전 그만두는 게 온당하다'는 유수호 전 의원의 정계은퇴 선언 등을 보면 우리가 흔히 보수를 비하하는 꼴통 보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유수호 전 의원을 정치적 신념이 있는 사람이거나 그의 모습 때문에 유승민 의원이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성공한 지역 토호 정치가로서 그가 가진 정치적 유산과 인맥이 유승민 의원에게 내려온 것만은 분명합니다.
유승민 의원과 박근혜 대통령, 유수호 전 의원과 박정희 간의 관계는 그들이 가진 정치적 생각이나 살아온 환경이 다르므로 늘 충돌과 반목이 있었습니다. 대를 이은 악연보다는 그들 사이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과 배경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박과 비박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이 네 사람이 보여준 말과 행동, 관여했던 사건 등을 통해 우리는 현대 정치사가 돌고 돌면서 한국의 정치가 그 안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재연되고 있는 역사의 교훈과 경고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