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결과, '너목들'과 너무 닮아
아이엠피터
2014. 2. 14. 08:00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이 23년 만에 무죄로 판결 났습니다. 1991년 5월 8일 당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이었던 김기설씨의 분신자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김기설씨의 친구였던 강기훈씨는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았습니다.
강기훈씨는 계속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23년 만인 2014년 2월 13일 재심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유서 대필 및 자살 방조에 대해 무혐의 무죄로 판결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
1894년 프랑스 육군 대위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간첩이 쓴 문건 하나 때문에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판단한 유일한 증거는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와 이름이 일치한다는 이유였는데, 이후 진짜 간첩이 발견됐다. 이 과정에서 간첩은 무죄로 드레퓌스는 형량만 감량됐다가 1906년에야 무죄가 선고됐다.
1894년 프랑스 육군 대위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간첩이 쓴 문건 하나 때문에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판단한 유일한 증거는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와 이름이 일치한다는 이유였는데, 이후 진짜 간첩이 발견됐다. 이 과정에서 간첩은 무죄로 드레퓌스는 형량만 감량됐다가 1906년에야 무죄가 선고됐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드레퓌스 사건과 유사한 이유는 당시 증거에 대한 검찰의 기소와 재판 결과가 너무나 엉터리였으며, 진실을 외면했다는 점입니다.
' 유일한 증거, '필적 감정 '너무나 달랐다.'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쪽은 검찰이었습니다. 당시 시국 사건으로 분신, 자살하는 사례가 늘자 정구영 검찰총장은 '분신자살에 조직적인 배후가 있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정 검찰총장의 지시에 따라 검찰은 김기설씨의 친구인 강기훈씨를 유서 대필의 범인으로 몰았고, 재판부도 그가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고 판결했습니다.
1991년 국과수는 강기훈의 필적과 김기설의 유서가 동일하다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2007년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과거사위는 필적감정을 위해 국내외 여러 곳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는데, 2007년 감정 결과는 김기설씨 유서와 강기훈씨의 필적이 다르다고 나왔습니다.
'유서대필 사건'의 핵심은 유서를 누가 썼느냐입니다. 당시 유서를 쓴 사람이 강기훈씨가 아니라면 1991년에 유죄를 선고받은 재판은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검찰의 엉터리 수사와 재판'
2007년과 1991년의 필적 감정 수준이 달랐기 때문에 나온 판단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뒤인 1991년 5월 25일 동아일보 1면에는 전민련이 제공한 수첩에 나온 김기설씨 필적과 유서가 동일하기 때문에 '유서대필'은 아니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시 전민련이 제공한 수첩에는 수배자 명단 등이 들어 있었지만,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위해 검찰에 수첩 원본을 제출했습니다.
이 정도면 이미 검찰의 강기훈씨 기소가 엉터리였음이 밝혀졌겠지만, 검찰은 필적 감정 대조문건으로 유서는 제외하는 방법 등을 동원하며, 이제는 수첩이 조작됐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1991년 국과수 감정 결과에도 분명 업무일지와 전민련 수첩은 유서와 동일하다고 나왔지만, 검찰은 끼어있는 3장의 찢어진 부분이 본체와 맞지 않는다며 수첩이 조작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강기훈씨 변호인들은 수첩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검찰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수많은 증거 글씨를 제출했지만, 재판에서는 채택되지 않았고, 오히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증거들만 채택되는 식의 엉터리 재판이 계속됐습니다.
'정권 비리를 용공으로 덮어버리는 수법'
그 누가 봐도 필적 감정으로 강기훈씨의 필적이 아님에도 왜 검찰과 재판부는 강기훈씨가 유서를 대필했다고 했을까요? 그것은 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88년 여소야대가 3당 야합으로 무너지면서 노태우 정권 후반기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점차 다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 1991년 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진압경찰의 쇠파이프에 의해 사망합니다. 이를 계기로 범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었고 이 기간에 국민들의 민주와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습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높았던 배경에는 '수서지구 특혜 분양 사건', '국회의원 뇌물 외유 사건','대구 페놀방류사건' 등으로 정권의 비리와 문제점이 계속 나왔던 점도 있었습니다.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사망 사건부터 6월 29일 대책회의 명동성당 철수까지 무려 13명이 분신,투신,의문사로 사망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이렇게 정권을 위협하는 분신,사망 사건이 정권을 바꾸려는 배후세력의 음모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을 만든 것입니다.
' 정치검찰의 화려한 출세기'
똑똑하고 잘난 검사들이 논리적으로 유서 대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정권의 요구대로 철저히 증거를 조작 왜곡했고, 결국 정권에 충성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냈습니다.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모두 총괄했던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아직도 권력의 중심부에 서 있습니다.
부장검사였던 강기욱,남기춘,윤석만은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으로 모여, 정치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곽상도 검사는 현재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절대 권력자의 품에서 그녀를 향해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들뿐만 아닙니다. 강기훈씨를 그토록 괴롭혔던 신상규 강력부 수석 검사는 부장검사, 중수부 과장, 지검장 등을 역임하다가 2009년 변호사로 개업 부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이엠피터는 강기훈씨의 무죄 소식을 보면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일명 너목들)라는 드라마가 생각났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억울하게 26년간 옥살이를 했던 황달중은 서대석 판사가 밉지만 '내 남은 인생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진실을 알고도 황달중을 억울하게 옥살이 하게 만든 서대석 판사는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게 도대체 뭔데..'라며 절대로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강기훈씨는 '유서대필 사건이 추억에서나 존재하는 게 되길 바랍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항소심 주심 판사였던 윤석중은 '당시 판단에 오류는 없었다고 본다'고 아직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외쳤던 사람은 오히려 23년 동안이나 고통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진실을 은폐하고 정권에 충성했던 자들은 출세를 통해 부와 권력을 손에 쥐었습니다.
아이엠피터는 드라마 너목들과 달리, 용서와 화해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동안 진실을 위해 싸운 강기훈씨에게 위로와 희망의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