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제주이야기

벌초방학, 감귤방학...제주만의 독특한 '이색방학'

 

 

추석이 가까워져 오면서 주말이면 전국적으로 벌초를하러 오가는 차량으로 고속도로 곳곳이 정체됩니다. 제주에서도 매년 음력 8월 초하루가 되면 오름 주변이나 산간 도로가 벌초 차량으로 뒤덮입니다. 제주에서는 보통 음력 8월 이전이나 8월 1일에 벌초를 합니다.

 

제주에서는 일가가 모여 조상 묘소를 벌초하는 것을 “소분(掃墳)한다”, “모듬벌초한다”, "모듬소분"한다고 합니다. 제주에서는 ‘제사는 지내지 않아도 남이 모르지만, 벌초는 안 하면 금방 남의 눈에 드러난다','추석 전에 벌초 안 하면 조상이 덤불 쓰고 명절 먹으러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벌초하지 않는 일을 가장 큰 불효로 보기도 합니다.

 

벌초하는 날이면 회사에서는 휴가를 내줬고, 공무원들도 연가를 받았습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도 명절에는 오지 않아도 이날만큼은 비행기를 타고 꼭 와야 했습니다. 만약 오지 않으면 양말이나 장갑, 내의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요새는 벌금처럼 돈으로 냅니다.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벌초에 애착을 가진 제주에서는 '벌초방학'이 별도로 있었습니다. 2003년 이전까지는 제주 도내 초중고등학교 100%가 음력 8월 1일에 '벌초방학','성묘방학'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풀을 베는 어른들 틈에서 풀을 나르기도 했고, 점심이나 간식 먹는 재미에 푹 빠져 소풍처럼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주에는 '벌초방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리 수확 철에는 '보리방학'을 감귤 수확 시기에는 '감귤방학'을 했습니다. 수확철이 되면 한꺼번에 인력이 필요했지만, 제주는 섬이라 금방 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아이들도 일손을 거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3년이 지나면서 벌초방학이나 보리방학, 감귤방학을 하는 곳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벌초를 꼭 음력 8월 1일에 하기보다 주말에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점점 보리농사나 감귤농사를 짓지 않는 곳이 많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 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민간인희생자 명단 ⓒ겨레하나

 

제주에서 유독 문중이나 일가의 벌초를 함께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제주 4.3사건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는 가족마다 4.3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희생자가 많았습니다. 제주 4.3사건 피해자 중에는 아이는 물론이고 온 가족이 모두 학살당해 후손이 일가친척밖에 남지 않은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문중 사람들이 돌봐주지 않으면 벌초조차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제주에서는 꼭 모듬벌초가 끝나야 직계가족의 개인벌초를 했습니다. 주변에 '골충'이라는 임자없는 묘소가 있으면 같이 해주는 미덕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마을과 가족에게 대물림되고 있는 모습이 제주의 벌초 문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초중고의 벌초방학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대학교에는 벌초방학이 남아 있습니다. 총학생회의 요청에 따라 하는 곳도 있고 안 하는 곳도 있지만, 대학생들이 벌초방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벌초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지로 간 사람도 있고, 나이가 많아 벌초를 하기 힘든 노인세대가 점점 늘어나면서 대학생까지는 벌초방학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제주에도 이제 젊은 청년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게스트하우스나 카페,식당 등을 하려고 오는 사람은 늘어났지만, 정작 제주의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거나 낮은 임금 때문에 오히려 육지로 떠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땅을 팔아 장사를 한다고 성공할 보장도 없거니와, 오랜 세월 농사짓는 부모님의 고생을 옆에서 본 자식들 입장에서는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입니다.

 

 

제주에 산 지 이제 6년째가 되어갑니다. 제주의 독특한 문화를 그냥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문화가 생겼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가 될 뿐 아니라, 제주의 아픈 역사에 분노가 치솟을 때가 많습니다.

 

척박한 제주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를 듣노라면 어쩌면 아이엠피터는 부모님 덕분에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부모님을 떠나 살다 보니, 얼마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는지 깨닫습니다.

 

이번 추석에 육지 부모님을 뵈러 가느냐를 놓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8월에도 육지에 갔다왔고, 온가족이 차를 끌고 육지에 가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벌초방학'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으면서 참 못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자식들 손과 입에 뭐라도 챙겨주려고 하는 마음,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잊고 살았기에 죄송스러웠습니다. 이번 추석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꼭 부모님께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