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사

[이승만 특집방송 반대]이승만은 왜 부통령을 암살하려 했는가


어제는 제헌절이었습니다. 제헌절은 말 그대로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날이었지만,일요일이라 기억조차 못 한 사람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헌법을 만든 입법기관을 우리는 '제헌국회'라고 부르며, 제헌국회 초대 국회의장은 이승만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이승만은 수없이 많은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민의 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치졸하고 노련하면서 독재와 불법을 자행했던 사람입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역사의 인물을 KBS에서는 8.15 특집 방송으로 보도하려고 합니다. 

친일파를 영웅으로 만들어 버렸던 KBS에서 이승만을 얼마나 위대한 영웅으로 둔갑시킬지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이승만은 영웅은커녕 우리나라 정치를 비롯해 대한민국을 망쳐놓은 인물인지 시리즈로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이 글을 통해, 'KBS 8.15 이승만 특집방송' 이 왜 방영되면 안 되고, 그가 얼마나 대한민국 역사의 치욕스런 인물인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부통령들

이승만은 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정,부통령 체계 속에서 이승만은 부통령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이승만 대통령과 부통령의 모습들을 통해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낱낱이 파헤쳐 드리겠습니다.


제1대 부통령 이시영 <시위소찬>

1948년 7월12일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이시영이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 참의와 법부 민사국장,한성고등법원 판사,대한제국 법부 위원을 역임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했던 이시영 일가는 독립군의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던 그는, 해방 이후 원래 이시영 가문의 중구 저동 땅 2만 평을 찾게 해주겠다는 이승만의 말에 " 내 땅 찾으려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라는 말로 거절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습니다. 

건국 이후에 65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제헌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그는 1951년 5월1일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합니다. 도대체 그는 왜 초대 부통령자리를 스스로 사임했을까요?  

원래 제헌국회에 의해 부통령에 선출된 이시영은 노구의 몸을 혹사하면서 열심히 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특히 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승만의 견제와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시영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권력에 대한 야욕을 느끼고 사직서를 제출하는데 <국민에게 고한다>라는 사직서에는 왜 그가 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앙을 실추하며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있으니,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대통령에게 보좌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과거 3년 동안 아무런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더불어 고락과 생사를 같이하려 한다.

나 이시영은 본시 노치(老齒)인 데다가 무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선량 여러분이 돈독한 중의를 모아 부통령으로 선출해 준 데 대해 과분하고 또 참괴한 일로 생각했으므로 사퇴할까 했으나 외람되게 대임을 맡았던 것이다. 취임 3년 동안에 아무런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시위(尸位)에 앉아 소찬(素餐)을 먹는 격에 지나지 못했으므로 이 자리를 물러나서 국민 앞에 무위무능함을 사과함이 도리인 줄 생각되어 사표를 내는 것이다. 선량 여러분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규탄하되, 모든 부정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이시영이 사임하게 된 배경에는 <국민방위군> 사건이 있었습니다.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전쟁 중 이승만은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해서 17세 이상 40세 이하 군인과 공무원이 아닌 장정을 국민방위군으로 편성하고 우익단체 '대한청년회' 단장 김윤근을 준장으로 임명하고, 우익 청년단 간부들을 장교로 임관시킵니다. 

서울에서 무려 50만 명의 국민방위군을 모집한 후에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50만 명의 장정을 부산과 대구로 이동시킵니다. 그런데 혹한의 추위 속에서 100일 동안 행군 중 아사자와 동사자 5만여 명이 발생했는데, 이는 국민방위군 장교들이 장정들에게 돌아갈 식량과 피복등 군수품을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이시영은 멀쩡한 장정들이 부정부패 때문에 수만 명이나 굶어 죽거나 동사했던 사실을 이승만에게 항의했으나, 엄청난 사태의 책임자였던 이승만의 방패막이 신성모에 의해 김윤근이 무죄를 받게 됩니다. 

이승만은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추궁하는 이시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국회 부의장과 각파 대표들이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을 만류해달라는 요청에도
" 부통령이 현 정부를 만족하게 생각지 않아서 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리느냐." 라며 오히려 그의 사임을 반가워했습니다.
 
자신의 친위대에 의해 저질러진 전대미문의 부정부패 착복으로 수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죽여놓고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잘못을 지적한 부통령의 사임을 좋아라 했던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습니다.

 


제2대 부통령 김성수 <친일파조차 이겨낼 수 없었던 이승만>

김성수는 동아일보와 경성방직, 그리고 정치가로 활동하며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친일 행각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시영이 부통령을 사임하자, 51년 5월17일 국회에서 부통령 보궐선거를 치렀고, 74표를 얻은 김성수가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성수는 "오죽했으면 이시영 부통령이 그 자리에서 물러났겠느냐."라며 수락을 거절했었습니다. 하지만 민국당 간부들의 거듭되는 요청을 받아 5월18일 제2대 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김성수도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부통령을 사임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노련한 친일파 출신 정치가도 결코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신성모 주일 대사 임명
1951년 6월26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신성모 국방장관을 주일 한국대사로 임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성수는 “두 사건에(국민방위군,거창양민학살) 대해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주일대사로 임명되어 한국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이승만 처지에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양민학살의 실제 책임자는 자신이기에 그 꼬리를 자르려고 실무책임자였던 신성모 국방장관을 해외로 빼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김성수가 반대하자, 그 뒤부터 반이승만파 김성수를 지독히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 1952년 5.26 정치파동
전쟁의 책임론과 부정부패로 이승만은 간선제 대통령으로는 선출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론을 들고 나왔지만, 국회 표결 결과 143대 14로 대통령직선제' 개헌론은 부결되었습니다. 

대통령 연임이 좌절된 이승만은 김창룡을 시켜 대구교도소 죄수를 공비로 위장시킨 후 금정산에서 총을 쏘게 한 후, 이것을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직선제를 반대하던 야당의원 50명을 헌병을 동원해 연행합니다. 

"내가 국회 부의장으로 있을 때에 저 유명한 정치파동이 있었습니다. 순경이 국회의원을 끌고 다니고 국회의원을 버스에 실은 채 헌병대로 끌어가고 곽상훈씨 외 12명의 우익의원을 국제공산당과 연락이 있다 해서 무동의로 체포 구금하고 기립투표를 시켜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그 파동입니다. 버스 사건이 일어나자 신의장과 내가 이대통령을 방문해서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대통령은 “그놈들이 오늘 국회에서 장면이를 대통령으로 선거한다지” 하는 말씀이 있어서 그것이 오보(誤報)라는 것을 설명하고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정보이니 말할 것도 없고 설혹 그 사람들이 대통령을 반대하는 일을 한다손 치더라도 저런 일(버스째 끌고 가는)은 중지시켜야 됩니다. 그것은 나라를 위해서나 이대통령 각하를 위해서나 좋은 일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항의나 권고는 청허되지 않았고 버스는 끌려가고야 말았습니다." (조봉암,내가 걸어 온 길>

김성수는 이승만과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려고 했고, 이승만의 불법을 계속해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가였던 김성수도, 대통령이 되려고 헌번을 고치고 무력을 동원하고,북풍 공작을 했던 이승만에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2대 부통령 김성수도 52년 5월29일 ,독재이승만을 규탄하는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제3대 부통령 함태영 <순둥이를 이용한 사기꾼 이승만>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는 고종 때 무과에 급제한 함우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 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기재판소 판사, 한성부재판소 검사,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法部) 법률기초위원, 대심원 판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독립협회 사건 때 이상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연동교회가 양반과 천민으로 나뉘어 양반들이 연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를 설립했으나 "신분의 차이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양반이면서 천민과 함께 연동교회에 남았습니다.
 
원래 함태영은 제2대 부통령 선거 당시, 김성수의 78표에 비하면 현저히 적은 10표밖에 득표를 못했던, 정치 세력이 별로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함태영은 김성수 부통령 사임 후에 치르는 제3대 부통령 선거 자체에 출마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승만이 강권하여 제3대 부통령으로 만듭니다. 

이승만은 이시영,김성수가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면서 사임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에 따를 수 있는 인물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원했고, 정치 세력도 없고, 반이승만파가 아닌 함태영이 적임자였습니다.

결국, 강직하고 올바른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함태영을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부통령을 만들어 내세웠던 것입니다.


제4대 부통령 장면 <제거당할 뻔 했던 이승만의 정적 장면>

1956년 5월15일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와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 된 이승만은 504만 6,374표,조봉암은 216만 3,808표.부통령으로 당선된 장면은 401만 2,654표,이기붕은 380만 5,502표의 개표결과가 나왔습니다. 

부정부패와 신익희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장면이 이기붕을 월등한 표차로 이기고 부통령에 당선되자 이승만과 이기붕은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956년 9월28일 명동 시공관에서 장면 부통령이 괴한에 의해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행히 총알이 왼손만 스쳤을 뿐 별다른 부상이 입지 않은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범인은 김상붕이었습니다. 당시 사건 현장에 금방 출동한 김종원 치안국장에게 체포된 김상붕은 민주당 당원의 친적으로 밝혀졌고, 이는 민주당 내부의 권력 싸움 때문이라고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4.19 이후에  이기붕의 지시에 따라 자유당 정책위원자 이기붕 최측근인 임흥순이 장면 부통령의 암살을 지시한 수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임흥순이 자유당 고위 간부와 저격사건을 논의했고, 이익흥 내무장관 → 김종원 치안국장 →특정과장 장영복 →시경 사찰과장 오충환→저격범 김상흥까지 저격 명령을 체계적이고 철저하게 시행했다는 수사결과가 이승만의 하야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이승만은 왜 장면을 제거하려고 했는가?

제4대 부통령으로 취임식에 참석한 장면에게, 이승만은 부통령 취임식 자리조차 마련하지 않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부통령 취임자가 취임연설조차 하는 시간을 주지 않아서 장면 부통령은 별도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마저도 '장부통령 경고 결의안'을 자유당을 통해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제1대,제2대 부통령에게 정치적 압박을 받아, 순진한 함태영을 제3대 부통령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정,부통령 직선제)에 이승만이 걸려든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노쇠한 이승만이 죽기라도 하다면, 장면이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기로 되어 있어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장면은 없어져야 할 가장 최우선 순위 인물이 된 것입니다. 

"장면부통령 저격사건."은 독재권력자와 그 권력을 이어받아 똑같이 독재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철면피 같은 이승만과 이기붕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었습니다. 

자료 인용 및 일부 글 발췌: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유석춘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김삼웅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이주영 '이승만과 그의 시대',김일영 '건국과 부국',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노보,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국가정부기록원,호용관 '장면부통령 저격사건'


KBS는 지난해 12월부터 ‘이승만과 제1공화국’이란 제목으로 ‘이승만 특집’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언론노조 KBS본부)가 공개한 프로그램 기획안에 따르면 ‘이승만 특집’은 △개화청년 이승만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대한민국을 건국하다 △이승만과 한국전쟁 △제1공화국의 명과암, 이렇게 5편으로 구성되고. 제작비만 6억5천만 원에 이르는 방대한 특집방송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정당하게 선출된 부통령들이 사임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고,자신의 정권 야욕을 위해 멀쩡한 백주대낮에 한 나라의 부통령을 암살하려고 저격했던 배후가 이승만입니다.  

이승만은 제헌국회부터 헌법을 자신의 대통령 임기를 위해 뜯어고치고, 무력을 동원하고, 거짓을 일삼고  정치적으로 대한민국을 최악의 독재,비민주국가를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그런 치욕스런 역사를 만들었던 인물을 공영방송 KBS가 국민의 수신료로 특집방송을 하려고 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건국한 인물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망하게 만들려고 했던 죄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헌법과 질서,민주주의를 파괴한 국가적 범죄자를 미화하는 방송을 보고 싶습니까?

역사를 바로 알아야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올바른 민주주의가 세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