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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김창룡,일본과 독재의 앞잡이가 아직도 국립묘지에 있다니


1박2일 이수근씨의 캐릭터는 앞잡이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을 일러바치길 잘하고 이간질을 잘한다고 해서 앞잡이 입니다. 실제로 앞잡이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사주를 받고 끄나풀 노릇을 하는 사람이지만, 대표적으로 쓰이는 말은 일제의 앞잡이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도 문제이지만, 일본이 강제로 점령하는 시기에 같은 민족끼리 너무 큰 아픔과 고통을 주고, 그 일로 인해 민족의 분열과 가치관, 그리고 국가의 원칙이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면서 내세웠던 정책은 무력을 이용한 공포정치입니다. 그 대표적인 무력행사 기관이 바로 헌병입니다. 원래 헌병은 군대 경찰이지만, 무력을 통한 국내 경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직으로 조선에 상시 주둔하며, 최고의 무력 통치 기관으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일반 경찰 업무뿐만 아니라 정치와 정보 업무까지 수행한 일본 헌병은 그 힘이 막강했습니다. 그 힘이 어느 정도 막강했는가는 일본 헌병이 차고 다니는 군도에 있습니다. 이 군도는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보통 일본군인도 헌병에게 즉결처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헌병은 일본인뿐만 조선인도 될 수 있었는데 일본 육군사관학교나 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 가능했습니다. 그 이외에 헌병보조원이라는 헌병의 정보원 업무를 수행한 사람 중에 아주 큰 공을 세우면 정식 헌병으로 승진시켜주었습니다.


일본헌병이 막강한 무력을 행사하기에 일본헌병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헌병이 아니라 헌병보조원이라 불리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바로 조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헌병은 조선어를 잘 못하고 조선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지만, 헌병보조원들은 같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정보를 빨리 알아내고, 수색이나 체포도 훨씬 잘했습니다.

이 헌병보조원 제도는 매국노 이완용이 주장해서 만들었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조선 주재 일본 헌병은 천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봉기하는 의병을 막아낼 수 없어서, 이완용은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헌병보조원 제도를 만들자고 일본 장군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건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 헌병이 2,000명으로 증원되었을 당시에 헌병 보조원은 4,000명이나 채용되어, 일본헌병과 함께 의병을 비롯한 독립군과 항일 투사들을 탄압,수색,체포,고문하였습니다.

일본헌병 보조원들은 일본헌병보다 더 악랄하게 고문을 했고, 조선인 사이에서 이간질과 정보를 취합하기 위한 무고한 사람 체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법적인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나온 일본 앞잡이라는 말이 대한민국 국어사전에까지 등재된 것입니다.


일본헌병이라면 조선 독립군을 체포,고문하는 임무를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독립투사를 체포하고 고문했던 일본헌병 출신 김창룡은 지금 대전 국립 현충원 장군 묘역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김창룡은 처음부터 일본헌병이 아니라 헌병정보원으로 활약하다 공을 세워 오장 (하사관)까지 승진하고 군조(중사)로 제대한 인물입니다.

김창룡은 1940년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입대하여 조선독립군과 항일조직을 체포하는 탁월한 공로로 승진했다가 1945년 전범으로 체포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실제 일본군 출신으로 사형선고까지 받는 사람은 대단한 고위직 전범으로 분류되었던 점으로 미루어,그가 관동군 헌병대에서 얼마나 입지적인 인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친일파 분류에는 일본군 소위이상으로 복무한 자에 해당하지 않기에 친일파로 분류는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독립군과 조선인 탄압과 학살,체포의 최일선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는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남한으로 내려와 특무부대를 창설하고 군대 내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충성을 다했던 친일파를 대거 등용했습니다. 정부수립 후에 경찰은 일본 경찰과 헌병 출신을 임명했고, 육군 총장과 합참의장을 비롯한 군 조직에는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를 등용해,이승만 정권 = 친일 내각이라는 공식을 성립시켰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들이 행했던 극악한 죄를 사죄하는 자도 없었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고발했던 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일제강점기처럼 고문하고 투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파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온갖 불법과 비리를 자행했으며, 그중에서도 김창룡은 이승만의 앞잡이로 그 역할을 너무나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북풍이라고 부르는 정치가 있습니다. 국내 정치 문제가 있을 때,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오거나 북한의 위협이 있던지, 남북 문제가 경색되어 온 국민의 관심이 북한 문제에 휩쓸려 정치 현안이 소멸하는 현상입니다. 이런 일은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난국을 해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습니다. 북풍의 원조는 이승만과 김창룡입니다.

1952년 5월24일 무장공비가 부산 금정산에 출현하여 총격을 가합니다. 이승만은 부산도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고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국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5월26일 직선제를 반대하며 내각제를 주장하던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가 연행합니다.

이런 일련의 파동을 부산정치파동이라고 하는데, 무장공비는 김창룡이 대구형무소 중형수에게 석방 조건으로 공비로 위장시킨 후 사살한 가짜였으며 계엄령을 선포하기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계엄령을 통해 이승만은 전쟁에 대한 책임과 국민을 버리고 도망친 문제,대통령 재선 불안을 일거에 해소시켰습니다.

부산정치파동 이후에 이승만은 친일파 백선엽을 육군총참모장으로 임명했습니다.

[韓國/정치] - 일본특수부대출신 백선엽 장군이 한국의 영웅?

김창룡은 이전에도 이와 같은 유사 사건을 조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조작한 '혁명의용군' 사건은
이승만과 함께 친일파들이 어떻게 부정과 부패 속에서 권력만을 유지하려고 애썼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은 그 주모자 최능진, 오동기, 서세중, 김진섭 등이 남노당과 결탁하여 무력혁명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김일성 일파와 합작하여 자기들 몇 사람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려고 공모했다"(동아일보 1948. 10. 23)

여기서 우리는 오동기라는 인물을 주목해야 합니다. 오동기 소령은 일제강점기 중국으로 건너가 강무당에 입교(낙양군관학교 전신)하였고, 상해사변시 제19로군에 소속되어 일본육전대와 항일전을 펼쳤습니다. 중일전쟁 때는 한국인 2개 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고,해방 이후 경비 사관학교를 거쳐 제14연대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오동기 소령은 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부대 내 식량급식의 부당함을 해결하기 위해 부식을 공개 입찰하였고, 장교들이 착복하던 부식비를 사병들에게도 균등하게 지급했습니다. 또한, 여수시내에 부대원의 외상값을 조사하여 모두 갚아주었고,철저하게 군인을 훈련 시켰습니다.

이런 진정한 군인을 김창룡은 왜 공산당으로 지목하여 체포했을까요? 바로 오동기가 항일전을 펼쳤던 인물이고, 군대 내 부정부패를 척결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친일파 김창룡과 채병덕에게 오동기와 같은 군인은 제거해야만 자신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었고, 이승만은 그 후에 벌어지는 여수반란 사건을 김구와 함께 엮으려고 했었습니다.

김창룡은 일제강점기에서는 일본의 앞잡이로 이승만 정권에서는 독재 앞잡이 역할을 너무나 완벽하게 수행한 대한민국 최고의 앞잡이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김창룡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독립군을 체포,구금하는 악질 헌병으로 살았고 해방 이후에는 민족 지도자 김구 선생을 암살하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법적으로 물적 증거가 없다고 과연 그가 김구 암살의 배후가 아닐까요? 안두희는 병상에서 지령에 가까운 암시였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안두희는 김구 선생 암살 이후 승승장구하여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범인치고는 너무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김창룡에게 공과를 물어 그의 일제강점기 헌병 경력을 덮어두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공이 무엇입니까? 해방이후 이승만을 위해 진정한 군인을 빨갱이로 만들어 체포한 일이 공입니까? 아니면 죄수를 공비로 변장시켜 사살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게 한 일이 공입니까?

그가 육군 최초의 국군장으로 치렀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김창룡은 월남 후 국방경비대 (육군의 전신) 제5연대 (부산)에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훈련이 힘들다고 탈영했던 인물입니다. 탈영한 인물이 악독한 행동으로 부하에게 암살되었는데 국군장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1948.9.22 법률 제3호)에는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에 대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김창룡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르면 결코 특무대장을 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중용했고, 김구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이 김창룡 장례식에는 참석했습니다.

참고 자료및 문헌 및 이미지 출처: 국가기록원,MBC PD수첩,정지환 기자의 역사추적기,
반민족연구소 '청산하지 못한 역사' 박준성 '김창룡과 그의 묘갈',동아일보,조선일보,서울신문,

김창룡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어떻게 이런 인물이 국군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국군기무사에 의해 대한민국 호국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에 안장되었는지, 피가 거꾸로 솟구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정권을 잡고 친일파를 숙청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실형 선고 7명,실제 형집행 0명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어떠합니까? 사형집행만 3.800명이었습니다.

친일파를 숙청해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친일파에 의해 숙청을 당했고, 이들은 이런 잘못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권력을 잡으려고 부정과 부패, 무력과 독재를 행사하였습니다. 그런 기득권 세력들이 여태껏 대한민국의 상위 1%를 장악하고 사회의 비리와 부패,권력싸움,재벌 횡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오동기는 일본 앞잡이 헌병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해방이 된 조국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진정한 군인으로 살다가 빨갱이로 몰리고, 다시 고문당하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난 속에 죽었습니다.

오동기와 같은 항일투사를 체포 고문했던 일본 앞잡이 헌병 김창룡은 해방되고도 살아남아, 항일투사들을 빨갱이로 둔갑시켰고, 독재자 이승만의 앞잡이로 살다가 부하의 손에 암살되고도 국군장으로 호화롭게 죽어서 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드골은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를 엄중하게 처단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프랑스를 배신하는 프랑스인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만 어려워도 대한민국을 배신하는 한국인이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